아들의 이야기

어른이 된다는 것

박중련 2009. 2. 24. 17:46

                                                                                 이글은 현열이가 10학년 때 썼다.

 

버스가 멈추자 좌석 위에 있는 깜빡등이 빤짝거리기 시작하면서 그 밑에 있는 지친 학생들을 깨우고 있었다. 차 바깥에서 기다리는 긴장된 부모들 사이에서 스타벅스 유리창에 기대고 있는 아빠의 모습이 보였다. 지난 겨울방학 때보다 아빠의 앞이마는 주름졌고, 자랑스러운 진한 눈썹은 얇아졌으며, 하얀 반점들이 머리표피 전반에 스며들며 그의 까만 머리를 파고 들어가려고 전쟁 중이었다. 내가 만약 보딩스쿨에 가지 않았다면 조금씩 변해가는 아빠의 모습을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방학 때마다 나는 부모님의 늙어가는 모습을 보아야 했고 냉혹한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이러한 변화들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5시간이나 차를 타고 뉴햄프셔 주 엑시터 시에 처음 갔을 때를 기억해 본다. 나는 유명한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에 다닐 수 있는 특권을 누리며 내 또래 학생들이 4년 후에나 감사하게 생각하는 경험을 지금하고 있다. 그때는 짐을 싸고, 추수감사절, 성탄절, 또는 봄방학이 되어 3개월 후에 집에 돌아와서 짐을 다시 푸는 것의 의미를 확실히 몰랐다. 나는 아빠가 학교를 떠나 집으로 향할 때마다 한 번도 그가 내일 또는 그 다음날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을지를 생각해 보지 않았다. 나는 형상을 그려보고 다시 짜 맞추어야 알 수 있는 아빠의 변화된 모습을 보게 되는 3개월 후까지 그의 마지막 모습을 가슴에 지니고 있어야 했다.

 

내가 처음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아빠와 나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공백이 존재했다. 우리의 포옹은 사랑스럽고 진실되기 보다는 이상하게 형식적이거나 부자연스러웠다. 나의 길고 단단해진 손은 그 동안 아빠를 포옹할 때 감쌌던 방향에서 어긋나곤 했다. 방학이 되어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집에 돌아왔지만 결코 내 집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없었다. 항상 나는 "그래 이제 집에 왔다."라고 확실히 느낄때 까지 집 구석구석과 다시 친숙해질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집은 내가 누구인가를 기억하기까지 아마 며칠쯤은 걸릴 거라고 생각했다.

 

나무와 숲으로 둘려진 나의 어린 시절의 넓은 뒷마당은 들쭉날쭉한 잔디밭의 한 부분처럼 작아보였다. 어렸을 때는 축구공으로 한 번에 양 끝까지 차기 힘들었지만 이제는 그 둥근 것을 양쪽 두터운 숲속에서 찾아야만 했다. 잔디밭 옆에는 벽돌로 아름답게 꾸민 나의 어린 시절 작은 농구장이 쉬고 있다. 이 경우 '쉬다.'라는 말은 농구장의 깊은 정지 상태에 대해 관대하고 완곡한 표현일 것이다. 한때 생동감이 돌았던 농구장은 화분과 화단장비들이 채워진 상자가 차지하고 있으며 한쪽 구석에는 오래된 농구공이 이것들이 둘레를 에워싸는 것을 막지 못하고 그대로 놓여 있다. 이 낡은 농구공과 마찬가지로, 내 삶의 변화에 대한 불평들은 아마 끊임없이 변해가는 내 집에 내가 한 부분이 아니라는 허탈감에서 왔을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은 내 의사와 관계없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나는 집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데서 소름끼치게 전혀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있었다.

 

내가 부모님의 노화에 대해 전혀 손을 쓸 수 없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나 내가 만약 집에서 학교를 다녔다면, 최소한 그러한 변화들을 점차적으로 받아들이 수 있었고 주위에서 일어난 일들을 육안으로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부모님과 만나는 처음 1-2분 동안 그들의 지난 3개월간의 생활을 읽으려고 할 때, 고통들이 내 몸 위아래로 찔러대는 것을 느낀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친구들이 내게 "집에서 멀리 떨어진 학교에 다녀서 얼마나 행복하냐?"라고 말할 때 심한 분노를 느낀다. 그럴 때면 그들의 무지에 대한 동정심보다는 내 처지에 대한 처절함이 엄습하고 그들을 부러워하는 마음이 내 안에 확산된다.

 

아마도 나는 두 세계가 존재하는 감정의 복잡성을 아직도 납득 못하고 있는지 모른다. 내가 내 뒤뜰, 내 가족, 내 집에 대해서 걱정하게 되고, 내 또래 학생이 그의 유년시절 일들에 관여하고 싶어하는 것이 정말 이상하다고 느낄 때, 나에게 어른이 되어가는 가속도가 붙는다는 것을 상상하기 힘들다. 삶은 가차 없이 내가 조정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속도로 지나가고 있다. 나는 단지 그에 굴복하고 따라갈 수 밖에 없다. 아마도 그렇게 하면서 나는 가족과 함께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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