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시터에서는 12학년이 되면 모든 학생들이 명상(Meditation)을 하면서 10페이지 이상의 영작문을 써야 한다. 자신이 엑시터에서 영어교육을 받은것을 이곳에서 맘껏 나타내는 논문형식의 작문이라고 보면된다. 자기 일생에 있어서 가장 영향을 주었던 내용을 주로 다루는데, 현열이는 아빠가 족보를 보여주던일, 월드컵을 보러 아빠와 단둘이 손잡고 한국에 갔던일, 그리고 친척들을 만났던일, 우리가 사는 생활들에 대해서 자신의 심경을 토했다. 아빠의 아메리칸 드림은 그의 12페이지 정도 영작문의 마지막 장이다. 엑시터에서는 가장 잘 된 명상 페이퍼를 한 학년에 10개씩 모아 5년마다 50편을 한 책으로 만들어낸다. 그리고 학생들이 명상을 나눌수 있도록 봄학기때에 아침조회시간대에 필립스교회에서 시낭송과 같이 자신의 명상을 낭독하게 하기도 한다. 엑시터에서는 영작문을 하나의 예술로 승화시켜 그것을 음미하는 습관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나는 항상 아빠를 아메리칸 드림을 추구하는 이민자로 상상했다. 아빠는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미국으로 왔다. 그는 미국에서 처음 2년간을 슈퍼마켓에서 박스보이로 일했으며,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통해 졸업자격증을 받은 뒤에야 대학에 등록할 수 있었다. 아빠는 교과서의 영문들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어서 책 전체를 외우며 보냈던 시간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는 커가면서 그 이야기들의 중대성을 실감할 수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에서 처음 연구논문을 작성하고 나서, 나는 그가 대학 초기에 영작실력이 모자라서 논문의 모든 문장을 각주로 처리했다는 말의 의미를 마침내 이해했다.
그러나 아빠의 역사를 이해하는 뒷면에는 늘 추한 진실이 내 마음에 남아 있었다. 그것을 인정하기는 창피하지만, 나는 항상 아빠가 그의 잠재력을 다 발휘하지 않으며 살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아빠는 미국에서 가장 좋은 비즈니스 스쿨을 졸업했다. 그러나 그는 대학친구들이 다니는 큰 회사들을 마다하고 소박한 회계사무실을 여는 길을 택했다. 그는 뉴욕 시 34가 코너에 있는 한 빌딩 5층에 작고 아늑한 오피스를 갖고 있다.
우리가 아빠 대학 친구들 모임에 갈 때마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하여, 더 심하게는 아빠를 위하여 당혹함을 감추려고 했다. 이러한 모임이 있을 때마다 맨션들 앞에 한 줄로 주차해 있는 최고급 차들을 보면서 항상 무언가 부족함을 느꼈다. 우리 가족 다섯이 미니 밴에서 나올 때면, 말하기 애처롭지만 나는 자주 실망감에 휩싸였다.
아빠는 친구들처럼 도시에 있는 큰 회사에서 일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혼자 일하는 길을 선택했으며, 그의 고객층은 한인동포사회를 위해서 일하겠다는 그의 책임감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한인 학부모들을 위해 미국대학 학자금 가이드를 발행했고, 해외에 살고 있는 미국시민권자 한인학생들이 미국에서 무료 공교육을 받게 하기 위해 법정투쟁을 해서 권리를 되찾아 주었고, 수많은 언론기고와 세미나를 통해서 세무와 교육에 관한 지식을 한인사회에 전했으며, 한인회 자문회계사로서 뉴욕한인회의 여러 세무와 재정문제 해결을 위해서 봉사했다.
바로 그러한 사실들이 한국에서 돌아온 나에게 마침내 강하게 다가왔다. 그는 굉장한 교육을 받았지만, 그를 키워 주었고, 그를 양육시켰고, 그를 확인시켜 준 커뮤니티에 돌려주는 길을 선택했다. 여기서 나는 한국 쪽에 남아있는 선택을 한 그의 결정이 얼마나 뜻 깊은 것인지 깨달았다. 이 연결은 그에게 화려한 옷이나 좋은 차들보다도 더 가치가 있었다. 그는 자신만의 아메리칸 드림을 갖고 있었으며, 그것은 내가 당시에 상상했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과 대학 입학사이의 여름휴가가 다가오면서 하루하루가 더욱 길게 느껴진다. 이번 여름에 나는 두 달간을 한국에서 보내려고 마음먹었다. 나는 한국어를 더 잘 구사하기 위해 그곳에 있는 한 대학에서 공부할 것이다. 맞다, 어린 시절 여름방학 거의 전 기간 동안 자신의 한국어 숙제를 숨겼던 그 학생인 바로 ‘나’다. 나는 친척들을 만날 계획을 갖고 있다. 누구든지 내가 최소한 식사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들이면 된다. 이번에 나는 아빠와 함께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빠는 항상 나와 다른 식구들을 연결하는 고리가 되어주기 위해 그곳에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나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나의 한부분과 나와의 관계를 창조하며 유지해 가고 싶다.
내 나이 여섯 살 때, 당시에는 미처 알 수 없었지만, ‘스쿠비 두’ 광고시간에 아빠가 보여준 그 큰 파란 책이 내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었을 것이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나와 친척들 간에 연결이 얼마나 약한지 깨닫기 시작했다. 나는 세대를 내려가면서 우리의 결합이 불가피하게 점점 약해져 갈 거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매일 아침마다 거울은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그러나 60세대를 거슬러 올라가고 한국인들이 지금 사용하는 한글이 있기 전의 나의 한쪽 부분은, 내가 적극적으로 보호하지 않으면 미국에서 영원히 위협받을 것이다.
힘들겠지만, 나는 조상으로부터 받은 한국의 전통유산이 내 정신 속에 살아있도록 최대한 노력해야 한다. 나는 아빠를 보면서 두 세계의 역동적 중간점을 유지하는 것이 결코 불가능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았다. 아빠는 그의 생애동안 60세대의 역사가 빼곡히 적혀있는 큰 파란 책을 계속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은 오직 명함첩과 전화 한 통 뿐이라는 것을 여러 상황을 통해 내게 보여주었다.
I had always pictured my dad as an immigrant who pursued the American dream. My dad came to America before he could graduate high school in Korea. Therefore, after spending the first two years in America as a box boy in a supermarket, he received his GED and eventually matriculated to college. He would tell me of the hours he had spent memorizing his textbooks because he could never completely understand the English words he had to read. As I grew older, I began to realize the magnitude of the stories he would tell. After my first research paper in high school, I finally understood what he meant when he said that he used to footnote every sentence of his papers throughout college because he could not convey himself through English.
However, behind my understanding of his history, there always was an ugly truth that lingered in my mind. As embarrassed as I am to admit this, I always thought that my dad was living beneath his potential. My dad graduated from one of the best business schools in the country. However, he decided against joining some big corporate firm like his former college friends had done and chose to open a modest accounting practice instead. He had "settled" for his cozy little office on the corner of 34th street, two streets away from New York City’s Koreatown.
Whenever our family would go to his college reunions and see my dad's friends, I would harbor embarrassment for my sake, and worse, for his. I always felt lacking when I’d see a row of top-of-the-line cars parked in front of the mansions in which these reunions would occur. As my family of five would roll up in our minivan, as pathetic as it is to say, I was often covered in disappointment.
He could have worked for any major firm in the city, like many of his friends do now. Yet, he chose to work for himself and have a client base that reflected his commitment to serving the Korean American community. He continues to serve the Korean community by publishing a college financial aid handbook for Korean Americans, fighting legal battles for the free education of Korean American students who were raised overseas, holding seminars and writing columns to educate Koreans about the importance of education , and helping to solve the Korean Association of New York’s many financial and tax problems as a volunteer. After my return from Korea, these facts that finally hit me. Although he had received a tremendous education, he chose to give back to the community that had raised him, nurtured him, and identified him. Yes, he could have worked anywhere. And from this that I realized how profound the choice to remain in touch with his Korean side was to him. This connection was worth more to him than fancy suits or nice cars. He had his own American dream, and it consisted of more than I imagined at the time.
The days seem to grow longer as the summer between high school and college approaches. This summer, I have my heart set on going to Korea for a solid two months. There I will take summer classes at a university and learn to speak Korean more proficiently. Yes, me, the kid who hid his Korean school homework for the entire, well, most of the summer. I am planning on meeting my relatives, whomever I can, and at least share a meal with them. This time, I won’t have my father there, but I am beginning to think that that may be for the better. My father won’t always be there to be a connection between the rest of my family and me, and I hope to create and maintain my own relations with a side of me that I can no longer ignore.
I couldn’t have known it at age six, during the commercials for Scooby Doo, but that big blue book that my father showed me would have a tremendous impact on my life. Over the past years, I’ve begun to realize how fragile the connections are between my relatives and me. I also know that with each passing generation, the bonds between us will invariably grow thinner. Each day, the mirror reminds me that I am Korean. However, I know that that side of me will forever be endangered in America if I don’t actively intervene: a side of me that goes back sixty generations and predates the very language that Koreans now speak. Although it will be difficult, I must try my hardest to keep my Korean heritage alive. As I look to my father, I am comforted by the knowledge that it is not impossible to maintain a dynamic equilibrium between two worlds. Through his life, my father has shown me that in many cases, all it takes is a Rolodex and a phone to keep that big blue book containing sixty generations of history rigidly intact.
'아들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를 위하지 않는 (Non Sibi)" 정신을 실천하는 현열 (0) | 2012.08.24 |
---|---|
아들 현열이의 대학입시에 대한 생각 (0) | 2009.04.09 |
To Be Me (0) | 2009.03.31 |
어른이 된다는 것 (0) | 2009.02.24 |
엑시터 동창으로서의 회상 (0) | 2009.0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