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성이 없는 법규는 가치가 없다.”
오클랜드 시민들을 실망시켰던 라마포 인디언힐즈 학군의 청사
내가 살고 있는 뉴저지 버겐카운티 오클랜드시는 라마포 인디언힐즈 학군내에 속해있다. 이 학군은 와이코프(Wyckoff), 후랭크린 래크스(Franklin Lakes, 일명 ‘후랭크린’) 그리고 오클랜드(Oakland) 세 동네가 모여서 형성되었다. 그리고 학군의 교육위원들이 모여서 의견을 조율한다. 나는 여기서 이 교육위원회가 학생들을 학군 내에 있는 두 고등학교에 배정하면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소개하고자 한다.
미국의 학군제도는 일반적으로 유치원부터 8학년까지는 동네를 단위로 만들고 고등학교인 9학년과 12학년까지는 몇몇 동네가 합해 공동학군을 형성한다. 만약 한 동네에 학생 수가 많을 때는 유치원부터 12학년까지를 관리하기도 한다. 2-3동네가 합쳐서 고등학교 학군을 형성하는 이유는 경제의 규모와 고등학교 운동부나 여러 특별활동을 하는데 최소한 인원이 어느 정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거주하는 오클랜드는 유치원부터 8학년까지 타운이 독자적으로 학군을 운영하고 9학년부터 12학년까지는 인근 와이코프와 후랭크린과 함께 속해있는 라마포학군이 운영한다. 와이코프는 인구가 2만, 후랭크린은 1만, 오클랜드는 1만5천정도 되는데 그 비례에 따라 교육위원수를 배정하였다. 라마포학군에는 와이코프에서 4명, 후랭크린에서 2명, 그리고 오클랜드에는 3명을 포함 모두 9명의 교육위원이 있다.
예전에는 후랭크린에 있는 라마포고등학교("라마포") 하나로 세 동네를 커버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1964년에 베이비부머들이 크게 늘어나 후랭크린 옆 오클랜드에 인디언힐즈 고등학교("인디언힐즈")를 하나 더 세웠다. 문제는 세 타운에 사는 학생들을 두 학교로 나누는데서 생겼다. 1971년부터 와이코프와 오클랜드에 있는 학생들은 각각 라마포와 인디언힐즈에 다니고, 그 중간에 있는 후랭크린 지역은 반으로 나눠 와이코프에 가까운 쪽은 라마포로 오클랜드에 가까운 쪽은 인디안힐즈로 다니게 했다. 따라서 후랭크린 중학생들은 졸업하면 자기가 사는 위치에 따라서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이곳 사람들은 이 선을 우리의 삼팔선과 같이 후랭크린 분리선이라고 부른다.
사회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와이코프의 평균 집값은 부유층 후랭크린과 중산층인 오클랜드의 중간 정도 된다. 한국도 강남의 부촌인 8학군이 대학입학성적이 좋듯이 와이코프 쪽에 있는 라마포 학생들의 수능(SAT)평균점수가 약간 높고 대학 진학율도 좋다. 그리고 학생 수가 많아 선수 선발폭도 넓기 때문에 운동도 더 잘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같은 후랭크린이라도 라마포를 갈 수 있는 쪽의 집값이 인디언힐즈 쪽보다 약간 높았다. 인디언힐즈 쪽에 사는 후랭크린 주민들은 그 점이 항상 불만이었다. 물론 가장 중요한 이슈는 후랭크린 학생들이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친한 친구들과 헤어지게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후랭크린 주민들은 중학교 졸업생들을 한 곳으로 모으거나 그들에게 선택권을 주기를 바랬다. 후랭크린 학생들을 한 곳으로 모으려면 수용시설이 크고 공 비율이 높은 인디언힐즈가 적격이었다. 인디언힐즈는 라마포보다 신설이었기 때문에 오클랜드와 후랭크린 두 동네 학생들을 커버할 수 있을 만큼 넓게 건축되었다. 그리고 후랭크린과 오클랜드는 전통적으로 축구, 라크로스, 하키 크럽 팀들을 공동 운영할 정도로 협조관계가 좋기 때문에 두 타운 학생들을 인디언힐즈로 모으는 것이 경제와 정서적인 면에서 타당했다. 그래서 이 안건이 교육위원회에 상정되었고 오클랜드와 후랭크린의 교육위원 5명이 받아드리면 통과할 수 있었지만 한 오클랜드 교육위원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통과되었어도 라마포쪽 후랭크린 주민들이 학군을 고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기 때문에 결과는 알 수 없었다.
이 문제는 매년 교육위원회에 상정되었고 결국 1997년부터 후랭크린 학생들에게는 두 학교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주고 오클랜드와 와이코프 학생들은 인근 고등학교의 학생 수가 다른 쪽 학교의 학생들 수보다 많은 경우에만 선택권을 주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모두에게 선택권을 주면 학생들이 라마포로 쏠릴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이 법규는 공정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오클랜드 주민들의 선택권을 박탈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왜냐하면 와이코프의 인구가 다른 지역보다 월등히 많았고 와이코프나 후랭크린에 사는 학생들이 대거 인디안힐즈를 선택해서 학생 수가 라마포를 초과할 확률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법은 오클랜드 학생들의 선택권이 없어진다는 것을 알면서 만든 법이어서 도덕성에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논리상으로는 완벽했기 때문에 한 오클랜드주민이 학군을 상대로 이법이 오클랜드주민들을 차별한다고 한 소송에서 패했다.
교육위원회는 이법이 실행되면 후랭크린 학생들이 대거 라마포쪽으로 몰려서 인디언힐즈의 학생 수가 큰 폭으로 감소할 것을 걱정했다. 마침 라마포학군은 두 학교의 학생 수 불균형 외에 버겐카운티의 특목고인 버겐아카데미에 우수한 학생들을 빼앗겨서 대학입학성적이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매년 약 40여명의 라마포학군의 영재들이 버겐아카데미에 다니고 있는데 한 때는 버겐카운티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기도 했었다. 이 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교육위원회는 유니버시티 프로그램이라는 영재 프로그램을 만들어 인디언힐즈에 유치했다. 그래서 매년 30여명의 와이코프와 후랭크린 쪽의 우수한 학생들이 인디언힐즈의 유니버시티 프로그램에 등록하면 학생 수 불균형 문제를 부분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 제도가 시작된 첫 해 후랭크린에서 인디언힐즈로 진학하는 학생 수는 전해에 비해서 약간 감소했지만 평년과 비슷했다. 반면에 라마포는 후랭크린 학생들이 소폭 증가해서 증축을 해야 했다. 후에는 라마포에 있었던 학군사무실을 인디언힐즈로 옯겨서 그곳 공간을 최대한 늘렸다. 다수의 의결권을 갖고 있는 와이코프와 후랭크린의 교육위원들은 라마포에도 형평성에 따라 유니버시티 프로그램을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엔 인디언힐즈의 기존 과학과 국제 경영 프로그램 외에 라마포에도 예능과 엔지니어링 프로그램들을 설치하였다. 인디언힐즈에다 영재프로그램을 만들어 라마포쪽 학생들을 유치시킨다는 본래 취지가 퇴색해 버렸다. 그러나 라마포의 유니버시티 프로그램도 모든 학군학생들에게 열려있기 때문에 오클랜드 주민들도 라마포로 갈 수 있는 길이 처음으로 열렸다. 하지만 와이코프에서는 인디언힐즈에 있는 유니버시티 프로그램에 가기보다는 그냥 라마포에 남아있는 경우가 많았다. 전 학년의 상위 30%의 학생들에게 열려있는 이 프로그램은 영재프로그램으로서의 권위를 잃고 예상 외로 푸대접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학군은 유니버시티 프로그램에 다니지 않고는 높은 내신을 받을 수 없게 규칙을 바꾸기도 했었다.
한 지역주민들의 선택권을 제한한 이 제도는 학군 전체 학생들에게 인성 교육면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라마포와 인디언힐즈 이 두 학교는 공부와 운동 모든 분야에서 라이벌 관계이다. 그런데 어느 운동경기에서 라마포학생들이 오클랜드학생들 대다수가 다니는 인디언힐즈 학생들이 있는 쪽을 향하여 선택권이 없는 것을 놀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당시 두 동네사람들이 느끼고 있던 생각이 철없는 학생들을 통해서 여과 없이 나타난 것이었다. 그 행동은 운동경기에 참석한 학생과 학부모 모두를 경악케 했다. 학생들은 교묘하게 논리적인 법을 만들고 다수결로 결정하면 다른 타운 주민들의 선택권을 제한해도 된다는 어른들의 논리를 보면서 자라났다.
이러한 부정적인 면들로 인한 심적 부담 때문에 학군은 2005년 5월 오클랜드주민들에게 “만약 학교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면 자녀들을 두 학교 중 어디로 보내겠는가?”를 물어보는 조사를 했다. 만약 오클랜드 주민들 대다수가 인디언힐즈를 선호한다면 구태여 그들의 선택권을 제한할 필요가 없다는 취지이었다. 대다수의 오클랜드 주민은 인디언힐즈를 선호했다. 다른 지역 고등학교에 가면 적응이 힘들어서 학생들이 중학교 친구들이 대거 진학하는 동네 주변학교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 조사결과에 따라서 2006년 9월 학기부터는 오클랜드지역 학생들에게도 선택권이 주어졌다.
다수에 의해서 제정된 라마포학군의 한 지역주민들의 선택권을 제한하는 이 법규는 논리적으로 완벽했지만 그 지역 주민들을 배려하는 도덕성이 부족했다. 그 결정은 죤 필립스박사의 덕과 지식(goodness and knowledge)의 교훈을 되새겨 보게 했다. 그리고 여기서 나는 평생 실감을 못했던 모교 펜실베니아 대학의 모토인 “도덕성이 없는 법규는 가치가 없다.”(Leges Sine Moribus Vanae)라는 말의 의미를 처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현열이가 고등학교를 결정해야 하는 시기에 그가 속해있던 와이코프 클럽 축구팀의 한 학부형이 이 이슈에 대해 "내가 오클랜드주민이라면 이 법을 좋아하지 않았을 것" 이라는 뼈있는 한마디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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