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아 6:3)
우리 부부는 지난 3월30일 결혼 16주년을 맞았다. 어느 날, 송명희 시인의 “나 가진 재물 없으나...”라는 성가를 부르던 나에게 어느 목사님께서 박 집사에게는 어울리지 않은 곡이라고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사실 우리는 축복이 넘치는 결혼생활을 해왔다. 만난 지 단 3개월만에 결혼했지만, 서로가 주님이 주신 배필인가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 때 그 순간을 주님 안에서 감사한 마음으로 돌이켜 보고 싶어 펜을 들었다.
나의 조부모님은 모두 함흥에 있는 미션스쿨인 영생고보를 졸업하시고 1919년 캐나다선교사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리셨다. 외조부모님은 외할아버지께서 1932년 세브란스의전 입학을 기하여 기독교를 믿기 시작 하셨다. 양가 네 분 모두 장로 권사이시고, 두 집안 모두 신앙과 교육을 중요시 여기었다. 네 분 모두 평균 95세 이상을 사셨을 정도로 건강의 축복도 누렸다. 나는 삼대째 믿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지만 여느 모태 신앙인처럼 미지근한 믿음생활을 하였다. 성년이 된 후에나 주님에 대한 첫 사랑을 느낄 수 있었는데, 내가 아내를 만날 때는 주님과 가까이 하려고 노력하던 때였다.
처가댁은 전통적 불교집안이었다. 한 예로 큰어머니께서 과부가 되신 후, 수원에 있는 봉영사에서 주지스님을 지냈다고 한다. 아내는 지금도 큰어머니가 해주시던 맛있는 절밥을 기억하고 있다. 그가 믿음생활을 처음 시작한 것은 대학 3학년 때이었다. 그리고 미국에 와서 순복음뉴욕교회에서 성령세례를 받고, 깊이 있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십 수년 전, 목사님이 아프리카를 다녀오셔서 영양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는 곳에 사자가 나타난 목격담을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그 때 한 영양이 사자를 향해 작은 뿔을 들이대며 바라보았는데, 그 모습이 장엄해 사자가 감히 덤벼들지 못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설교는 믿지 않는 친척들을 둔 아내에게 강하게 다가왔었다. 본인도 힘없는 존재지만 그 영양과 같은 위치에서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된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아내가 나를 만날 때는 뜨거운 초신자 이었으나, 그의 믿음은 그 후에도 꾸준히 성장하였다.
아버님은 1950년대에 미국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중 고등학교 영어교사로 인생을 시작하셨다. 그는 주님을 충실히 섬기셨으나, 대인관계가 원만치 못해 사회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하셨다. 밖에서 원만한 사회생활을 못하시는 아버님은 우리에게 경직된 삶을 요구하였고, 선생님 박봉으로 살아야 하는 어머니는 절약생활을 늘 강조하셨다. 이러한 상황이 우리 삼남매에게는 힘들었으나, 철이 들고서 부터는 주님이 우리를 모두 다른 형상과 인격체로 만들어 주신 것을 있는 그대로 감사히 받아들였다. 우리 집은 친가나 외가를 합해 제일 가난하였고 나는 어린 마음에 그것이 아버님이 선생님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선생님 직분은 숭고하다고 생각했었으나, 가끔 선생님으로부터 부정적 지적을 받았던 경험과 아버님에 대한 선입관등이 선생님에 대한 매력을 크게 못 느끼게 했다.
장인께서는 1950년대 초부터 친구와 함께 반도호텔 내에서 무역회사를 경영하셨을 정도로 진취적이셨다. 집사람은 1남 6녀 중 다섯번째 딸이다. 처가댁은 사업이 번창했던 50-60년대에는 상당히 풍요하게 지냈으나, 아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부도가 난 후부터는 매우 힘든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아내는 학교생활에 잘 적응했으며 대학을 마칠 때까지 선생님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무서운 선생님이셨던 아버님도 돌아가실 때까지 16년 동안 한 번도 그에게 역정을 내신 일이 없으셨다. 그가 선생님이 좋아하는 성격과 품행을 갖고 있음에 분명했다. 선생님으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은 그는 자연히 선생님가족에 대해서도 호감을 갖게 됐다.
내가 아내를 처음 만날 때인 1984년 말 그는 처음으로 결혼에 대해 기도 드렸고, 자신이 만날 배우자를 주님이 정해주시길 바랬다. 그는 상대가, 첫째 주님을 영접한 거듭난 신앙인 이고, 둘째 서로 신실하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며, 셋째 서로 장단점이 달라서 온전히 하나가 될 수 있는 사람이길 기도하였다. 기드온이 양털실험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듯이, 그가 알 수 있는 방법으로 선생님의 아들임을 통해서 기도의 응답을 확인하길 원했다. 우리가 만났을 때 아내의 첫 번째 질문은 “예수님을 영접했습니까?”였다. 그는 대화 중에 내가 선생님의 아들이라는 사실도 알게됐다.
나에게도 아내를 주님이 배우자로 주시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일들이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만났던 여자들은 신앙에 대한 대화를 하면 그들이 기독교도이건 이교도이건 나의 결혼관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아내와 하나님 둘 중에 한 명을 선택해야 된다면 후자를 택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해서였다. 그들이 자신만을 사랑해 주길 원하는 반면, 아내는 도리어 내 생각에 동감했다. 대학원 근처의 필라델피아 임마누엘교회의 담임목사님이 주례를 하셨는데, 목사님께서 식을 올리기 몇 일전 교회로 우리를 부르셨다. 목사님이 아내에게 기독교 가정 내에서 부인과 어머니역할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성경 구절을 언급하면서 결혼관을 또박또박 말하였다. 나는 목사님 안면에서 흐뭇한 미소를 발견할 수 있었고, 그 순간 주님께 깊이 감사드렸다.
이 글을 쓸 때쯤 나는 어느 전도사님 아들 결혼식에 참석했었다. 그 때 전도사님이 며느리 될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 왔는데, 첫째 하나님을 자신의 목숨보다 더 사랑하고, 둘째 하나님 다음으로 그 남편을 사랑해주길 바라고, 셋째 온유하고 겸손하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을 수 있는 여성이길 바랬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배우자관이 바로 그 전도사님 기도 내용과 비슷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주님은 우리의 결혼을 통해 그동안 감사하지 못했던 삼대 째 이어진 기독교 신앙과 선생님의 가정환경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끔 하셨다. 가끔 결혼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몇 가지 외부적인 조건을 결혼에 결부시키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 부부는 신앙 안에서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것 하나 만으로 기쁠 수 있었고, 그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서로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능력을 신앙생활 안에서 길러왔기 때문에, 각자 힘든 환경에서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만났을 지라도 주님이 주신 배우자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2001년9월19일 뉴저지 오클랜드 집에서 박중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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