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아 이것이 나의 한계인가 보다!

박중련 2009. 2. 4. 23:11

 

나는 내 인생의 한 부분에 대해서 관심 있는 학부모들로부터 질문을 많이 받는다. 그 이유는 많은 동포학생들이 노력하고 있지만 좋은 대학을 들어가기 어려운 현실에서, 고 3때 이민 와 어려운 조건에서 학업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마쳐서 인 것 같다.

 

1975년 6월 27일 김포공항에는 학도호국단 연병 훈련 시간에 담을 넘어 몰래 빠져 나온 약 20여명의 반 친구들로 웅성거렸다. 지금은 볼 수 없는 일이겠지만. 우리는 국제공항출구에서 응원가와 구호를 외치며 뜨거운 이별을 했다. 미국가면 직업의 차별이 없고 공부만 열심히 하면 소위 좋은 대학에 갈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부푼 꿈을 앉고 비행기에 올랐다.

 

막상 L.A.에 도착해보니 나이가 막 18세를 넘었기에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차이나타운근교에 있는 Evans Community Adult School를 다니며 고교졸업장을 받았다. 교회 친구들은 정규고등학교를 나와 UCLA나 USC등을 다니는데, 나이 사오십 되는 아주머니 아저씨들과 공부를 하자니 영 기운이 나지 않았다. 우리가족은 일년간의 L.A.생활을 마치고 코네티컷으로 이주했다. 부모님은 South Norwalk에서 그로서리 스토어를 경영하셨고, 나는 근처에 있는 Stew Leonard‘s라는 수퍼마켓에서 스탁보이로 1년간 일을 했다. 성인학교에서와 수퍼마켓에서 각각 1년, 도합 2년의 미국생활은 교육을 중요시하는 한국에서 자라온 나에겐 캄캄한 암흑 같은 시간이었다.

다행히 2년만에 Storrs에 있는 코네티컷주립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부모님이 미국생활에 잘 동화 안되시던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그 것은 내 일 즉 학업에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었다. 한국에서 주입식교육을 받은 나는 미국대학교육을 전혀 따라갈 수 없었다. 교과서 한 페이지에서 찾아야 하는 단어만도 10여 개 이상 되므로, 책을 읽는데 전혀 진전이 없었고, 또 주제를 찾는 일이 힘들었다.

 

우선 급한 대로 카셋트로 강의를 녹음해 다시 듣고, 교과서를 요점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방대한 부피를 요점정리하자니 개강일부터 한치의 착오도 없이 Final Exam준비를 하며 써내려 가야 했다. 요점정리를 또 요점정리하고 또 정리하니 백과사전 같은 교과서 내용이 Index card 열 장 정도로 정리가 됐다. 그리고, 영어를 많이 필요로 하지 않은 과목에서는 최고학점을 받아야겠다는 각오를 했다. 교과서에 나와있는 모든 문제들은 꼭3번씩 풀어 보았고, 모르는 대목은 교수님과의 대화시간을 최대로 이용했다. 항상 학업에 대한 강박관념이 있어서 잠이 잘 오질 않을 때가 많았다. 그럴 땐 꿈속에서 기억을 더듬어 교과서를 들여다보았다. 첫 장의 목차부터 마지막장까지 모든 내용이 한 눈에 들어왔다. 꿈속에서 나는 Page를 넘기면서 한 줄 한 줄 읽어나가고 있었다.

 

지금도 석차제도가 있는지 모르지만, 코네티컷주립대학에서 성적표를 받아 보니까 일학년 중에서 Top 1%가 나왔다. 교수들은 남의 3-4배되는 노력을 하는 지도 모르고 나를 수재로 생각해 주었다. 일 학년을 마치고 펜실베니아대학 와튼(Wharton)스쿨로 전학할 때는 그분들이 좋은 추천장을 써주었을 걸로 짐작된다. 정규대학에서 인정을 받은 나는 처음으로 남들과 같은 조건에서 대학에 지원할 수 있었다. 미국대학에 대해 잘 모르던 상황에서 SAT점수가 높은 경영대학을 찾다보니 와튼을 택하게 되었으며, 졸업하고 나서야 이 대학이 들어가기 힘든 곳이라는 것을 알았다.

 

와튼 3학년 때 학업에 제일 큰 고비가 왔었다. 재정학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Jeremy Siegel교수가 가르치는 과목이었는데, 교수가 처음부터 자신 없으면 빨리 Drop시키라고 경고까지 했었다. 이 과목에선 아무리 공부를 해도 중간성적이 D나 F가 나왔다. 신경쇠약으로 “아! 이것이 나의 한계인가 보다” 하면서 죽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 때 나의 신앙생활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모태신앙으로 교회생활은 꾸준히 했으나 고교나 대학입시준비동안은 주일을 안 지키는 융통성(?)있는 생활을 했을 정도로 성령과는 거리가 먼 생활이었다. 나는 성령 충만한 교회를 가면 내 자신이 절로 뜨거워지는 것으로 알고 그러한 교회를 찾아다니기도 했었다. 그러나 문제는 교회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 당시 대학근처에 있는 임마누엘 교회의 고인호목사님께 기도를 부탁하였다. 목사님은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먼저 용서하며 회개하라고 하시면서 같이 기도를 드리자고 했다.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라는 성경구절이 내 마음에 들어왔다. 두려움은 마귀가 역사 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주님이 합해서 선을 이루시리라 확신했다. 내 마음은 평온해 졌고, 그 과목 외 다른 과목에서도 좋은 성적을 받아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졸업할 때는 우등(Cum Laude)으로 졸업생 중 상위 30%안으로 학부를 마쳤다. 그 후 나는 다시 와튼스쿨에서 MBA를 받고 사회에 발을 디뎌 놓았다.

 

어려운 이민생활 중 내 가슴중심에 와 계셨던 분은 주님이었다. 주님은 절망하는 나에게 희망을 주었고, 내가 실천하려고 노력할 때 함께 계셨다. 내가 학업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인도하심 때문이었다. 이러한 값진 경험들이 나 개인의 영욕을 위해서만 쓰여진다면 분명히 주님의 뜻한 바가 아닐 것이라 믿는다. 주님은 지금 나의 믿음그릇을 크게 하시려고 단련시키고 있으시다. 나는 언젠가 주님의 계획에 따라 쓰임 받을 때, Yes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박중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