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유펜 학부시절의 한국 학생들(1979-1981)

박중련 2009. 2. 7. 00:04

 

유펜 학부시절의 한국 학생들

1978년 9월 유펜으로 편입한 나는 처음으로 미국 각주에서 온 한국학생들과 만날 수 있었다. 그 당시 유펜에는 20-30여명의 한국 학부학생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초등학교,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 때 미국으로 이민 온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거의 모두 한국어를 잘 구사했다. 이 들중 10여명은 지금도 뉴욕 시 근교에 살며 경조사나 생일날 만나서 친교를 나누고 있다.

 

내가 유펜에 오던 해까지는 유학생신분으로 다닌 학생들이 많았다고 한다.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에 이봉서(전 동자부장관)씨, 화신백화점 사장인 박흥식씨 아들, 아남산업회장이었고 현재 Amkor Technology회장이며 Forbes 400 세계 100대 부자 중에 낀 김주진씨가 다녔다. 동자부장관을 지냈던 이봉서씨는 1959년에 와튼 학부를 일등으로 졸업하였으며 그의 이름은 와튼의 자습실인 디어트리히홀의 명예의 전당에 걸려있다. 그리고 1970년대에는 김동조 외무장관의 아들인 김민영씨(현 외국어대 경제학과교수), 윤영각씨(현 삼정회계법인 대표), 유진오선생의 아들인 유 종(음악 평론가) 씨, 그리고 아버님이 고려대학 화학교수인 국 진 씨가 있었다. 1976년에 유펜에 입학한 친구 말에 의하면 그 해에 6명의 한국인 선배가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외교관이나 부유한 지식층 자녀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중 김민영씨와 국 진씨는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를, 그리고 유종은 태프트(Taft School)를 졸업했다. 1976년 이후에는 우리와 같이 이민 온 세대가 다녔으며 1980년 후반부터는 주로 미국에서 태어나서 우리말을 잘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주를 이뤘다.

 

몇 몇 학생들은 보딩스쿨을 나왔고 아주 프레피한 패션으로 옷치장을 하고 우리와 거리를 둔 학생들도 있었다. 내가 어울린 그룹은 이민 온지 얼마 안돼는 학생들이 이었다.  모두가 미국사회를 배우는 과정에 있었고 하루 하루가 새로웠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보수적인 한국사회에서 살다 온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학생은 마음껏 머리를 길렀고 양담배도 피웠고 그리고 학교식당에서 수돗물같이 나오는 콜라를 마음껏 마셨다.

 

마약중독인 한국학생이 금단현상 때문에 몸을 떠는 것도 보았고, 어느 여학생은 일학년 때 남학생과 동거를 하다 헤어져서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해 힘들게 대학생활을 마치기도 했다. 주말에는 친구들이 모여서 포커를 했는데 그 정도가 심해서 공부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자기 자신을 조절하는 학생들은 이러한 것을 머리 식히는 차원에서 하나 그렇지 못한 학생들은 자기 페이스를 못 찾고 학사경고를 받기도 하였다. 사실 4년 안에 학부를 졸업하기가 좀 힘든 경우가 허다했다. 1976년에 한국동포학생이 모두 13명이 들어왔는데 그 중 4명만 4년 만에 졸업하였다. 미국대학생의 반 이상이 4년 안에 졸업을 하지 못하는 통계와 비교할 때 그 보다도 못한 실적이다.

 

우리와 함께 다녔던 한국학생 중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은 손영권으로 그는 지도력을 몸에 타고났다. 그는 고등학교 1학년때에 메릴랜드 주로 이민을 왔다. 여느 이민을 늦게 온 학생들과 같이 영어에 액센트가 심했다. 그런데도 그런 것에 관하지 않고 여러 학생들 앞에서 당당하게 연설을 하곤 했다. 그는 대학 1학년 때 펜싱부에 들어갔는데 4학년 때는 주장까지 역임했다. 대학에 와서 처음 펜싱을 시작한 것에 비해 대단한 성과였다. 그 당시 유펜의 펜싱부는 전국 최강이었다. 내가 가끔 조깅하러 트랙에 가면 항상 몸을 풀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그 당시 유펜 Athletic Director인 앤디 가이거(Andy Geiger)가 스탠포드대학의 같은 위치로 자리를 옮길 때 그의 자동차를 친구와 함께 필라델피아에서 샌프란시스코로 드라이브했을 정도로 모든 사람들과 잘 지냈다. 그는 유펜에서 전자공학을 공부하고 휴렛트 패커드에서 2년간 엔지니어로 일을 하곤 MIT의 스로안 경영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Intel에 입사한 후 20대 후반에 Intel의 한국지점장을 역임했고 몇 년 후에 Quantum 이라는 미국최대의 Disk Storage회사의 사장을 역임했다. 그는 한국에서 열렸던 콤덱스에서 기조연설을 했을 정도로 IT세계에서 인정받았다. 그는 미네소타에서 온 180cm 장신의 유펜 영문학출신인 금발의 펜서와 결혼했다. 지금은 Venture Fund를 운영하고 있다.

 

1981년에 와튼학부를 졸업한 후  2년간의 직장생활을 하고 와튼 경영대학원에 입학해서는 메릴린치의 글로발 투자 사장을 지냈던 김도우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싱가포르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필립스 앤도버를 졸업했는데, 와튼 학부로 편입해 오기 전에는 웨슬리안대학을 다녔었다. 키가 비교적 작고 말이 없는 조용한 성격인 그가 공격적인 IB세계에서 성공할 거라고는 생각못했었다. 그의  결혼식은 알고 지내는 우리 유펜 졸업생들이 초대되었고 피로연은 뉴저지 주의 한 조촐한 중국식당에서 했었다. 그러한 그가 몇년 안되어서 메릴린치의 2인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놀랬다. 그의 성공담은 마치 앞서 언급한 선배들의 업적을 그늘에 가리는 듯 해보였으나 후에 뉴욕타임즈에서 메릴린치 패망의 원인 제공에  그가 핵심적인 역활을 했다는 전면기사를 접하고 우리들을 허전하게 했다.

 

현재 국무성에서 한국데스크 과장을 역임하고 6자회담의 미국대표중 한 명인 성 김(Sung Kim)대사는 TV에서 그런 역활을 하는 그를 볼 수 있을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인물이다.  나보다 서너 살 적고, 큰 키의 마르고 내성적이었던 성 김은 철학도로 늘 쿨한 모습으로 담배를 피우곤 했었다. 최근에 알게 되었지만 그의 아버님은 3공시대의 한국의 핵심 외교관이었다고 한다.

 

유펜졸업생들은 당시 서로 어울려 지내면서 마치 하루 하루를 무료하게 지낸것 같았으나 모두에게는 꿈이 있었고 상당수는 그 꿈을 이루었다. 2009년 현재 한국계 학생들이 약 500-800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30년전에 비해 100배 늘어난 숫자이다. 아쉽게도 유펜에는 두개의 한국학생 조직이 있다. 하나는 우리가 있을때 부터 있었던 KCS(Korean Cultural Society)와 한국에서 유학온 학생들의 모임인 KAP(Koreans at Penn)이다. 그러나 중요행사는 서로 협력히면서 하고 있다.

 

박중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