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2년 6월 9일 일요일 교회에서 할렐루야 축구단 멤버인 어느 분과 월드컵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분은 표만 구할 수 있다면 월드컵경기를 꼭 관전하고 싶다고 했다. 그때 내 머리를 주마등같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유소년 축구를 하는 13살짜리 아들 현열이도 보고 싶어 할까?"하는 생각 이었다. 현열이는 작년에 뉴저지 주 전체 대표팀에 들었었다. 그래서 그에게 월드컵은 의미가 클 것이라 생각되었다. 한편 축구응원을 하는 동족들의 모습을 보며 한국인으로서 자긍심을 느낄 수 있으리라 기대되었다. 더욱이 부자간에 정을 더할 수 있는 기회라는 데도 군침이 돌았다. 나는 곧 현열과 함께 3박4일의 한국방문계획을 세웠다. 일단 경기관람을 한국이나 미국 중 한 팀이 진출할 17일 전주나 18일 대전 16강전으로 생각했고 그것을 위해 모든 힘을 쏟았다.
우선 아들이 학교에서 3일간 결석하는데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내 사업도 지장이 없어야 되기 때문에 해야 될 일들을 마치기 위해 떠나기 전까지 밤늦게 까지 남아 강행군을 했다. 그리고는 한국에 가는 비행기 편이 있는가를 확인했다. 방학이 시작하는 시즌이라 좀 염려되었지만 자리는 있었다. 경기장 표는 은근히 한군데 믿는 구석이 있었다. 월드컵 관련업체인 삼촌에게 전화하니 한번 알아보겠다는 답을 받았다. 며칠 후 전주의 16강전 표가 확보되었다는 연락이 왔고 우리는 14일 저녁 11시55분 한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비행기 안은 좁았지만 우리는 모처럼 많은 대화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오래 만에 비행기에 탄 아들은 좌석마다 있는 비데오 스크린의 사용법을 터득해 아빠에게 사용하는 법을 가르쳐주며 채널을 돌려가며 즐기곤 했다. 앵커리지에 내려서는 맛가로운 인스턴트 우동을 한 그릇 사서 둘이 함께 홀짝 비웠다. 우리는 한국에서의 월드컵경기에 대한 기대 때문에 장시간의 지치는 비행기 여행이 마냥 즐겁기만 했다.
우리가 비행기에 오를 때는 한국이 포루투갈에게 이겨서 미국게임이 17일 한국게임이 18일로 결정이 난 후였다. 일단 미국게임을 전주경기장에서 보고 한국게임은 광화문이나 시청 앞에서 수십만 관중들과 함께 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다. 도착해서 삼촌에게 연락드리니까 아들과 함께 온 나의 용기에 감탄을 했는지 한국과 이태리게임 표도 구했다고 알려주셨다. 전주로 내려가는 기차안은 미국인과 멕시코인 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전주에서 본 미국과 멕시코 게임은 응원단들이 비교적 많지 않았고 낮에 하는 게임이라 산만하였다. 아들에게 누구를 응원하느냐고 물으니까, 미국이 이기는 상황이기 때문에 멕시코가 선전을 했으면 한다고 말한다. 멕시코가 미국에게 여러모로 경쟁에서 지는데 축구에서까지 지는 것이 안스럽다고 한다.
경기가 끝난 후 시외고속버스를 타고 대전 쪽으로 이동했다. 청주터미날에서 대학 교수인 친구가 나와 우리를 반겨 주었다. 우리는 대학 앞의 여관에서 여장을 풀었다. 그날 처음 온돌방에서 잔 현열이는 한국 베개가 매우 편한 것 같아보였다. 다음날 아침 친구가 천안 독립기념관으로 안내하였고 특히 유관순열사의 특별전시회를 감명 깊게 보았다. 그리고 속리산의 법주사에 가서 정이품 소나무와 우리의 산천을 볼 수 있었다.
그 날 오후에 우리는 역사의 현장으로 이동하였다. 약 4시쯤에 대전역에 내린 우리는 역 앞 광장에서 응원연습을 하는 붉은 악마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우리도 붉은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에 붉은 두건을 매고는 그들과 함께 경기장으로 행하였다. 경기장 안은 온통 붉은색이었다. 이태리응원단은 몇 백명 정도 밖에 안보였고 그나마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경기장안의 관객 중 99%가 붉은 티셔츠를 입고 응원을 하였다. 약 4만 명의 관중이 처음서부터 서서 응원하였고, 경기시간 117분 동안 붉은 악마 구령에 따라 박자를 맞춰가며 구호를 외쳤다. 대-한민국 따따따따따, 오 필승 코리아-, 한 점으로 뒤질 땐 "괜-찮-아", "괜-찮-아"를 외쳤고 동점이 되었을 때는 "한-골-더, 한-골-더"‚등 상황에 따라 창조적인 응원을 했다. 비록 후반 43분까지 지고 있었지만 질 것이라는 생각은 안했다. 우리는 마지막 휘슬이 불릴 때까지 혼혈을 다해 응원을 한다는 생각이었다. 동점골이 터지고 나서는 경기장 안은 완전히 절정에 달았고 고성 때문에 경기장구조물에 균열이 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안정환이 골든골을 집어넣었을 때는 너무 좋아하는 옆 사람으로부터 몇 대 두드려 맞기도 했다. 그 때 우리는 이 기쁨 때문에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는 상태였다. 게임이 끝나고 대전역으로 향하는 길은 치안이 마비되어 차들이 제대로 이동할 수 없었다. 그러한 와중에서도 군중들은 질서를 지켰고 차는 비좁은 길을 헤집고 역을 향해 달렸다. 가까스로 역에 도착한 우리는 좌석에 구애 없이 아무 열차에 탈수 있었다. 그날 기관사는 모든 승객에게 맥주 한 캔씩을 돌렸다.
새벽 2시30분에 서울역에 도착한 우리는 당일 뉴욕으로 돌아가는 관계로 내친 김에 동대문시장 새벽 장에 가서 쇼핑을 하려고 동대문 쪽으로 발을 옮겼다. 허지만 그곳에 도착해서야 시장이 월드컵 때문에 문을 닫은 것을 확인했다. 사실 월드컵 시작하기 몇 시간 전 한국은 모든 활동이 정지된 상태였다. 그날 저녁 뉴욕 행 비행기에 탄 아들과 나는 좌석에 앉아 지난 3박 4일 동안 있었던 일로 꽃을 피웠다. 아들이 갑자기 "한국에서 살고 싶다"는 말을 할 때 이번 여행이 그에게 값진 경험이 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현열이는 월드컵을 보고 온지 몇 달 안 되어 8학년 때인 10월경에 남북통일에 관한 수필을 썼다.
남북통일에 대한 나의 생각 (7학년)
이번 여름, 나는 모든 한국 사람들이 보고 싶어 했던 월드컵게임을 직접 볼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나는 한국 사람들의 애국심에 날라 가 버릴 것 같았고, 길거리의 빨간색 물결은 내 눈을 지치게 했다. 한국에서 나는 아버지 그리고 그의 친구와 함께 천안에 있는 독립 기념관을 방문했다. 가는 도중 아버지 친구께서 산봉우리에 있는 건물을 가리키며 저 곳이 남한으로 침투하는 북한 공군기들을 감시하는 관제소라는 말을 해주었다. 그 때 나는 별 의미 없이 들었다. 우리는 기념관에 가서 역사적 유물, 전시물, 영상물 등을 관람했다. 나는 한국이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유와 행복을 얻기 위해들인 힘든 노력에 놀랐다. 우리는 보고 나오면서 관제소를 다시 지났다. 그 때 나는 우리의 지난 노력이 하루에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실제로 한국은 박해로부터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나의 모국이 분열을 막을 수 있었던 갈등을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오늘날 남한은 위험을 느끼지 못하며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휴전선 너머 있는 북한은 많은 문제점을 앉고 있다. 가난, 배고픔, 질병 등이 온 지역에 만연하고 있다. 남한 사람과 같은 민족인 그들이 단지 살기 힘든 전체주의 정부가 있는 북쪽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죽어가고 있다. 그들도 우리와 함께 고대의 침략자들로부터 독립을 위해 투쟁하고 희생하며 싸웠던 같은 민족이다. 나는 남한 시민은 아니지만 나의 뿌리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큰 긍지를 갖고 있다. 이것이 나로 하여금 남북통일에 대해서 강하게 느끼게 하는 이유다.
통일이라는 말이 우리 귀에 즐겁고 쉽게 들리지만 완벽한 통일을 이루는 것은 매우 힘들다. 여러 곳에 풀린 구석들이 있다. 그러나 아무도 통일을 서둘러야 한다고는 하지 않는다. 통일은 부서지기 쉬운 것이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진행해야 한다. 우리가 일을 하나씩 풀어 나가면 결국 다시 한 번 통일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던 시간을 메우려면 남북한 모두 많은 돈을 써야한다. 두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시설을 건설하고, 가난한 북한 형제들에게 복지혜택과 의료지원도 해야 한다. 지금은 북한의 경제사정이 나쁘기 때문에 남한이 경비의 대부분을 부담해야 한다. 이러한 것이 남한 사람들 주머니에 큰 구멍을 내겠지만 우리는 한 발 더 나아가 갖고 있는 일전까지도 이곳에 부어야 한다. 성경에 심은 대로 걷는다는 말이 있다. 새롭고 번영된 나라를 이룩하려면 모든 것을 쏟아 부어야 한다.
남북한의 경제적 불균형이 서로간의 상처를 아물어 가는데 어려움을 줄 수도 있다. 사람들은 북한 사람들이 가난한 그들의 현실을 겸손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지 염려한다. 그들의 자존심이 도전을 받고 사회혼란이 일어날 수 도 있다. 이러한 것을 막으려면 남한사람들도 더욱 성숙해져야 한다. 우리는 아래로 내려 보는 북한사람들의 선조도 우리 선조와 함께 자유를 위해 싸운 사람들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갓난아이조차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작고 단순한 사회문제가 막강한 나라를 새로 건설하는데 방해하게 해서는 안 된다.
통일을 이룩함으로서, 우리는 끊임없는 반목에 대해 승리를 얻게 될 뿐 아니라 나라 간의 통렬한 비난에 반대한 영웅적 행동의 모범적 사례를 남길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 타 국민들이 남북 분열 때문에 한국인을 얕보지 않게 될 것이고, 우리는 더 크고 다양하며 힘 있는 나라로 커 갈 것이다. 우리가 하나 되면 한국을 일으켜 세우는데 더 많은 사람이 참여 할 수 있다. 우리 모두 조상들이 보여 주었던 높은 강도로 싸우도록 하자. 우리는 힘든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으며 끝내는 강한 국가로 발돋움 할 수 있다. 우리 모두 성실, 믿음, 지속, 희망의 한나라가 되어 보자. 그렇게 하면 지난날의 경제성장을 능가할 수 있고 우리 후손들을 위한 강한 기초를 세울 수 있을 것이다.
My views on Korean Unification
(7th Grade)
This summer, I had the privilege of attending two games at the World Cup 2002, which would make any Korean person envious. I was blown away with the patriotism in Korea. My eyes even hurt because of all of the red I saw in the street. In my heart, I could not comprehend how such a small country could be so strong as a unit. While I was in South Korea, My father, his friend and I went to the Korean Independence Museum. During the long drive, my fathers friend pointed out an air-patrol building on top of a mountain. He said that that building was to detect any possible air raids from North Korea. At the time, I was a bit indifferent towards it. When we went into the museum, I observed many artifacts, written displays, and video reenactments. I was amazed at the hard work that had been asserted into achieving the present freedom and happiness in Korea. When we finished viewing the museum, we passed the same air-patrol building. I couldn't stop thinking of how all that effort by Korea was in vain. Indeed Korea had reached freedom from persecution; however, it brought about a deep pain in my heart to know that my mother country could not resolve a conflict that would have prevented their schism.
Today in South Korea, generally most people live happily and unwarily towards danger. However, just north of the border, North Korea faces many problems. Poverty, starvation, and disease are running rampant throughout the country. People, the same as us South Koreans are dying just because they live north of us, in a totalitarian government unfit to live in. They are the same people who struggled, sacrificed, and fought for independence with us from ancient invaders that once conquered a united Korea. I may not be a Korean citizen, but I have pride and a great appreciation for my heritage. This is why I feel so strongly about the unification of North and South Korea.
Unification is pleasant to the ear and sounds so easy, yet to achieve perfect unification is incredibly difficult. There are loose ends everywhere. However, no one says we must accomplish this in a hurry. Unification is a fragile thing and we must proceed with caution and care. If we make one end meet at a time, eventually, we will have unification once again. The price to pay is extraordinary; however, the benefits are priceless.
To make up for the years of seclusion from each other, North and South Korea would have to pay a lofty amount of money. Some expenses would include connections in transportation between the two countries, welfare and support for indigent North Korean families, and medical assistance in the North Korean region. Due to the current economic status of North Korea, much of the expenses would have to be paid by South Korea. This could burn a large hole in South Korean pocket. However, we must go this extra mile, and put in every penny we have to accomplish this task. It says in the Holy Bible that one reaps what he sows. If we want to nurture a new and prosperous nation, we must give our very all.
The economic disparity would affect the mending process between North and South Koreans. one must ponder whether North Koreans are willing to humbly accept a position as the poorest of the poor. North Korean integrity would be challenged and social conflicts would develop. To stymie this occurrence, South Koreans must mature far past their current status. They must realize that the North Korean person that they look down on could have had a grandfather or great-grandfather who fought alongside their own in the fight for freedom. We mustn't let something as simple as a social issue, which even toddlers can resolve on their own, hindes us from the rebuilding of a mighty nation.
By achieving unification, we would gain not only victory over an endless feud, but we would also be a paradigm to the world of heroic action against a diatribe between nations. No longer would people look down upon Koreans due to the schism between the two countries, but respect and awe would stand of our ability to quell this malice that lasted long between North and South Korea. United, we would grow larger in area, diversity, and strength. Together as one, we would have a larger population in the effort in raising Korea up.
Let us fight with the same intensity that we, North and South Koreans alike, showed against adversity in the past. We have the ability to stand tall against hardship and eventually blossom into one strong nation. Let us become one nation in integrity, faith, persistence, and hope. We can surpass any previous economic achievement in the past and can establish a sturdy foundation for our children and children to come.
나는 7학년인 현열이가 3박4일의 짧은 월드컵 관전여행에서 남북통일에 관한 의견을 내놓을 수 있을 만큼 주의 깊게 관찰했다는 게 놀라웠다. 이번 방문을 통해서 한국의 역사와 남북이 대처하는 상황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월드컵에서 선전한 한국팀과 온 국민의 멋진 응원을 보고 한민족의 일원으로 큰 자긍심을 갖게 된 것은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성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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