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삼촌인 KT의 이용경 사장은 만 16살에 대학에 입학하면서 최연소란 소리를 들었고, 지금은 정보통신업계에서는 60세의 최고령으로 한국재계 6번째 규모의 기업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삼사십대 사장들이 맹활약하는 이 업계에서 계속 신상품을 내놓으면서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이용경사장의 살아온 배경을 지켜볼 수 있었던 조카인 나는 그의 인생역정을 한 번 회고해 보고자 한다.
그는 1943년 6월12일 생으로 나와는 14살 차이이다. 나는 초등학교 가기 전까지 안양에 있는 외갓집에서 자랐고 방학이면 대부분의 시간을 그 곳에서 보냈었다. 안양에 가면 가끔 안방다락에 올라가 옛날 사진첩과 골동품 등을 보곤 하였다. 좁고 캄캄한 공간에서 쪽 창문으로 들어오는 가느다란 햇살에 의지하며 외갓집의 역사를 확인하는 일은 어린 나에게도 흥미로 왔다. 그 중 하나가 외삼촌이 미국유학 갈 때 자신의 소지품을 모아둔 벽지로 도배한 궤짝이었다. 그 궤짝은 타임머신과 같이 외삼촌이 주로 대학 다닐 때 쓰던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검은 뿔테의 안경을 끼고 함박웃음을 하면서 친구들과 찍은 사진, 잡지, 노트, 그리고 작가 전혜린이 쓴 책 등을 보며 미국에서 유학하고 있는 외삼촌이 어떤 사람인가 그려보곤 했다.
외삼촌은 외할아버지가 만37세 그리고 외할머니가 만39세 때 나으신 늦동이로 3남2녀 중 막내이다. 그는 초등학교를 일년 일찍 입학했고 삼학년때 일년 월반을 해서 동급생보다 나이가 두 살 적다. 안양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경기중고등학교를 나와 만 16살 때 서울대학 전자공학과에 들어갔다. 그가 전자공학을 전공으로 택한 것은 앞으로 전자로 빵을 구워먹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마이크로 웨이브로 빵을 구울 수 있는 것을 볼 때 그 말은 적중 된 셈이다. 외할아버지께서는 중 고등학교, 대학교 입학시험, 그리고 유학 시험까지 당신의 마음 고생 한번 시키지 않고 매번 합격하였던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하셨다. 후에 외삼촌은 한국정보통신업계의 리더 중의 한사람으로서 외할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였다.
나는 미국에 유학 가 있는 외삼촌이 보내오는 편지를 외조부모님과 함께 보며 미지의 세계인 그 곳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면서 자랐다. 학교 문턱에도 못 가신 외할머니가 훈민정음에 가까운 필체로 쓰시는 편지 귀퉁이에 나도 MIT공대에 유학을 가서 훌륭한 과학자가 되겠다는 포부를 적기도 했다. 지금도 외삼촌은 나를 보면 MIT이야기를 하곤 한다. 외삼촌은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에서 광통신으로 박사학위 코스를 밟았다. 광통신이 지금에서야 우리사회에서 실용화되고 있는 것을 볼 때 35년 전인 그때는 아마 이론이나 실험단계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외조부모님이 1970년에 미국을 방문했을 때 중간기착지인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에서 두 분을 뵈러 온 외삼촌이 안경을 벗으면서 눈물을 머금는 사진을 본적이 있다. 이때 흘린 그의 눈물은 두 분을 뵙는 반가움도 있었겠지만 그의 박사학위 연구과정이 힘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외조부모님은 그가 대학에서 만들었던 바깥커버와 주파수 눈금이 없는 라디오를 사용하셨다. 에디슨 시대에 사용됐음 직할 진공관이 보이는 그 라디오를 내가 미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안양에 방문할 때도 듣고 계셨다. 아들이 만들었기 때문에 귀한 면도 있지만, 여기서 우리는 옛 것을 소중히 여기며 알뜰하게 절약하는 가정환경을 엿볼 수 있다. 외할머니는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관대하셨으나 체면치례에는 선을 그으셨다. 우리에게 늘 “남의 욕 삼일 안간다” 라며 분수이상 넘치는 행동을 자제하도록 하였다. 그가 KT에서 경비절약운동을 벌이는 것도 이러한 배경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책벌레는 아니었고 모든 것을 여유 있게 즐기는 스타일이다. 옷은 연구원보다는 비즈니스맨에 가깝게 늘 말끔하게 입고 다니는 편이다. 유학시절에는 오토바이를 타고 다녀서 주위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도 하였다. 그는 연구생활의 대부분을 뉴저지 우리 집 가까이 있는 홈델 (Holmdel)에 소재한 벨 연구소에서 보냈다. 미국의 연구소에는 우리나라 수재들이 수 천 여명 일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들에 대해서 잘 모른다. 록키산맥 한가운데서 한줌의 거름이 되기 위해 쓰러지는 아름드리 고목과 같이 그들은 사회를 변화시켜나가는 숨은 인재들이다. 오늘날 한국이 전자, 정보통신에서 이렇게 우뚝 설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의사인 아버지를 따라 의학을 공부했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있었다. 당시 그의 큰 형님은 한국최초로 신장이식수술을 했으며 의학계에서 인정을 받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의사가 사회에서 존경받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움을 누리는데 반해 연구원의 삶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며 경제적으로도 넉넉하지 못하다. 우리나라의 이과지망생의 대부분이 의대나 한의대에 진학하려는 것은 산업의 균형적 발전을 꽤해야 하는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는 불행한 일이다. 유펜의 1만명 학부학생 중에 물리학 전공인 학생이 10명 미만인 것을 볼 때 이것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만약 그가 의대에 갔었다면 훌륭한 의사는 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의 그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1991년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한국통신의 연구소 창설멤버로 입사했다. 이 결정은 그의 앞날을 통째로 바꿔놓았다. 그가 23년간 미국에서 얻은 지식과 몸담았던 연구기관의 좋은 환경과 여러 시행착오를 미리 경험한 것은 그가 KT에서 일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얼마 안되어 선로연구소장직을 맡았고 그 후 약10년간 천 여명 연구인력과 수천 억의 예산을 집행하는 연구개발본부장의 일을 하였다. 연구개발본부는 한국통신의 이익센터 중 하나였기 때문에 그의 위치는 실제로 단독회사를 경영하는 최고 경영자와 다름없었다. 그 동안 한국통신사장이 여러 번 바뀌었지만 그가 한 직책을 오래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지도력과 대인관계가 좋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모르지만 한때 군장성출신의 사장이 들어와서 무슨 이유에서 였던지 모든 조직을 위아래로 바꾸어 놓은 적이 있었다. 연구개발본부장을 하던 그가 어느 날 연구개발본부내의 무선통신연구소 소장이 되었고 그의 산하 연구소장이었던 분이 그의 상사가 되었다. 나는 그 후 얼마 안되어 외삼촌을 뉴욕에서 만났다. 그에게서 명함을 건네 받은 나는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몰랐다. 나는 외삼촌의 표정을 보면서 그가 현실을 잘 받아들이고 이 시련을 계기로 더 도약할 수 있기를 마음속 깊이 바랬다. 돌이켜보건 데 그가 만약 사표를 쓰고 나왔다면 지금의 그 또한 없었을 것이다. 그가 무선통신연구소장을 한 것은 KTF이동통신사장으로 가는 데 아마 프러스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KTF의 경험이 KT 사장이 되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그는 부드러운 성격을 가졌으며 남보다 한 박자 앞서는 위트가 있다. 나는 그가 화를 내는 것을 본적이 없다. 세간에는 그가 두 번은 부드럽게 참으나 세 번째 실수를 할 때는 메시지를 보낸다고 한다. 하여간 그는 힘든 상황 일 수 록 더욱 침착해진다. 그리고 그는 사나이다운 배짱과 상대방을 혼란스럽게 하는 포커페이스도 갖고 있다. 그의 바둑실력은 1급 정도 되는데 바둑을 둘 때면 물고늘어지는 끈질긴 승부근성을 보이기도 한다. 그는 복잡한 케이스를 단순화해서 의사 결정하는 능력도 지녔다.
최고경영자는 주주들에게 최대의 이익을 주는 기업, 기업 구성원들의 노력에 최대의 보상을 꽤하는 기업, 사회에 공익을 끼치는 기업이 되도록 힘써야 한다. “노력한 만큼 거둔다”는 그의 좌우명에서 보듯이 그는 KT를 세계 초일류기업이 되게 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KT는 우리나라 정보통신 산업의 주축기업이다. 그의 잘못된 결정이 우리나라 정보통신 산업을 후퇴시킬 수도 있으며 현명한 결정이 나라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는 어느 덧 자신보다 훨씬 큰 사람이 되어 있었다.
2004년 박중련
(외삼촌은 현재 창조한국당 국회의원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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