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초당 강용흘 선생의 20대 이야기

박중련 2022. 1. 7. 07:29

어느날 나의 조부 박성엽 님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할아버지께서 초당 강용흘 씨와 1910년대  후반에 함경남도 함흥에서 교제하던 이야기를 자세하게 써 놓으신 글을 발견하였다. 강용흘 선생은 제가 아버님과 같이 모시는 지창보 교수님과도 아주 가까운 친분 관계를 갖고 계셨고 제가 지창보 교수님 자서전에서 다루었고, 이글이 아마도 한국에서 강용흘 선생님에 대한 연구를 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되어 여기에 옮기게 되었다.

 

강용흘 姜鏞訖,Younghill Kang, 1898.5.10~1972.12.2

 

1965년에 발행된 함흥 영생중학교 동창회명단에 강용흘 선생이 맨아래 오른쪽에서 세번째, 그리고 왼쪽 끝에 박성엽 님이 저의 할아버지이시다.

 

 

세계 문호 초당 강용흘 씨와의 교제

 

그는 2학년 편입생으로 함흥 영생중학에서 나와 동급생이었다. 고향이 둘다 홍원으로 같. 그의 집과 나의 집은 오십리 거리에 있었다. 같은 고학생이요, 고향이 같은 점에서 그와 나는 각별하고 친밀한 사이였다. 그가 중학을 마치고 경향 각지를 편답하면서 전도사로, 교사로, 사업가로 전전하다가 3.1운동 직후 1920년에 도미하여 하버드를 위시해서 명문대학에서 수학하고 소설 초당을 창작하여 구미문단에 바람을 일군 장한 문학자였다. 그의 중학시절과 졸업한 2년간 사회생활 때의 상태를 이상 소상히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를 교실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인상

 

눈이 위로 째지고 눈동자는 빛나며 특히 입이 보였다. 둥근 얼굴에 약간 머문 빛을 띠어 미모의 청년은 아니지만 어딘가 열기에 정열파라고 보았다. 키는 5척이 넘는 정도, 옷모양은 퇴색된 검은 두루마기에 메트리 신을 신었다. 양말은 언제 신었는지 뒷금치가 내밀어 달걀같아 보였다.  서울 오성중학에서 1학년을 마치고 이곳으로 편입해 왔다. 입학 첫날부터 나를 따르며 친교하길 원했다. 그것은 동병상린이란 말같이 고향에 고학생이란 이유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면서 그는 그의 가정 사정, 사상 앞날의 포부를 털어놓았다.

 

그의 가정사정은 나와 비슷하나 한문실력은 너무 대단해서 내가 따를 없었다. 그리고 그는 장차 일제를 추방하고 조선을 독립시켜 국호를 대한이라 붙이고 자기가 초대 대통령이 되겠으니 나더러 국무총리를 맡으라는 것이다. 너무나 엄청난 꿈이라 생각하면서도 "그래 그렇지" 하면서 동조했다. 그가 일국의 원수가 되려면 첫째 세계의 위인들을 많이 알아두어야 하고, 몸을 튼튼히 해야하며, 웅변술이 있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이것을 실천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쓰고있었다.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둘이 손을 잡고 반룡산 노송이 우거진 숲속으로 들어가서 함흥 시가지를 바라보며 연설을 하며 웅변을 익혔다. 그리고는 둘이 나란히 앉아 일본놈이 안보이나 주의를 살피며 항일 방법론을 이야기 했다. 그의 아이디어는 영미국의 세력을 업어야 하고 미국이 봉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는 장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것은 상상조차 못했지만 언젠가 조선민족 항쟁은 크게 일어날 것이라 내다 보았다. 그는 일반 운동에는 소질이 없고 철봉대에 매달려 턱거리를 힘써했다. 너저분한 두루마기 깨진 신이 공중에 펄렁거리는 모양은 우습기만했다. 다른 학생들은 놀려주며 웃음거리로 삼았다. 나는 그에게 학생들의 놀림감이 되지 말라고 타일렀다. 그가 말하길 "그것이 아예 자극제야." 그래서 그는 신이 나서 철봉운동 연습을 하는 것이었다. 반년만에 철봉위에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기술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오랜 서당공부에서 휘어든 등뼈가 펴지고 앞가슴이 불끈나와 균형이 잡힌 체격으로 변했다.

 

그는 함흥시에 있는 캐나다 선교사 부톡도씨 집 청소를 해주고 학비를 받아썼는데 부 목사는 갑자기 성진항으로 전근 발령을 받고 곳 부임하게 되었다. 그는 강씨를 향해 이제는 학비지급이 곤란하다는 말을 남기고 서호진에서 배를 타고 후임지로 사라졌다. 그는 육로 300여리를 도보로 뒤를 따라갔다. 부 목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부 목사는 할 수 없이 공용이 아닌 자기 주머니에서 강씨의 남은 학업을 도와 준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강씨가 중학을 졸업하고 한때 부 목사앞에서 전도사 노릇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서울로 다시 올라가 항일 운동에 가담했다.

 

 

처음 자전거 타는 연습을 했던일

 

고향집으로 다니기 위해 자전거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내가 비용을 부담하고 낡은 자전거 두대를 세내어 갖고 발용산 락밀루 광장에 가서 하룻동안 연습하니 안전지대에서는 할 만했다. 안전장치가 없는 모르고 둘이서 서툰기술로 언덕배기 15도 가량 경사진길로 내려갔다. 걷잡을 없이 아래를 향해 내려가서 큰 충돌사고를 칠 것 같아 겁에 질려 몸을 나는듯이 틀어 자전거에서 뛰어내렸다. 요행으로 사람은 치지않았으나 자전거 두대가 산산 부서졌다. 세놓은 주인이 보상을 청해서 곤란을 겪었다. 그후 두사람이 자전거를 세내 갖고 150 길을 고향집을 향해 달렸다. 아직도 숙련이 덜 되었는데 함궐령 비탈길에서 크게 사고날 뻔하다가 위기 일발에 자건거에 뛰어내려 화를 면했다. 두사람의 몸은 그만큼 경쾌하고 민첩한 것이 강씨는 철봉 는 우수한체질을 가진 덕이라 생각된다.

 

강씨는 기억력 관연하여 상상을 초월했는데 한문 사서삼경을 암송했다. 학급에서 한문과정을 받다가 선생앞에서 자랑삼아 한문 대목을 단숨에 암송해서 선생과 급우들을 놀라게 했다. 그와 나는 졸업하는 1918년 4월 그는 서울로 나는 강원도 시골로 각각 나뉘었다

 

1919 8 어느날 강씨가 내가 살고있는 강원도 통천군 구렁마를이라 부르는 시골로 찾아왔다. 가방속에 필묵과 두루마리 편지용지를 갖고 나에게 편지 글씨를 대행해 달라는 뜻으로 서울서 온 것이. 그는 말하기를 편지는 가장 중요한 내용이기 때문에 경치좋고 고요한 안변 석왕사로 가자는 것이다. 이곳은 나의 집에서 90 거리에 있어 저녁늦게 도착하였. 석왕사 입구 별장촌에서 여관을 하나 빌려 들어갔다. 강씨는 저녁식사 후 10리길 되는 절에 올라가서 중들과 불도를 토론하며 밤을 세웠는데  사람의 건강상태가 좋아서인지 하루 도보여행에도 끗덕없이 피곤이 느껴지질 않았다. 절에 가서 사람을 유인해 개울가 2 다락방에 올라가 날이 새도록 불도 토론을 해서 진땀을 뺏다. 아침이 되어 여관에 돌아와 강씨는 사연을 이야기하고 나는 받아써서 장문의 편지를 닦았다. 내용인 현재의 자기 아내와 이혼해야 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미국유학의 길이 열렸으니 미국에 가면 돌아올 기회가 막연해서 아내는 딴길을 개척하라는 이혼 통고장이었다.

 

그는 1920 도미 하버드 여러대학에서 수학하여 서양문학을 전공하고 뉴욕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저작생활에 몰두했다. 처녀작 초당은 자서전을 소설화 장편이다. 저서가 구미문단을 풍미했다. 그 구상과 미문장이 독자들을 놀라게 했다. 그도 그럴것이 한문 사서삼경과 셰익스피어 전집을 암송하는 실력자였다

 

강용흘 선생의 대한 이야기: https://m.blog.naver.com/donghlee1001/222008104341

 

함남 홍원 출신, 재미작가 강용흘(1898~1972), 재미문학가 초당 강용흘의 롱아일랜드 변주곡(김지현

그는 대학졸업 후 미국에서《대영백과사전》의 편집위원으로 근무하면서 동양문학을 번역 ·소개하는 한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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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필 씨의 강용흘 선생에 대한 저서: http://preview.kyobobook.co.kr/epubPreviewPopup.jsp?type=web&barcode=4808952105264&search=Y&orderClick=LA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