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고인이 되신 외할머니를 생각하며

박중련 2009. 5. 6. 16:31

 

                                   2004년 외할머니가 100세 이셨을때의 나의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지금은 뉴욕시간으로 2009년 5월6일 새벽 3:12분 어제 저녁 서울에 있는 식구로 부터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하고 잠이 들었는데 그분과 지냈던 일들이 머리에 떠오르면서 일어나게 되었다. 부고 소식을 들었을때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 이유는 외할머니께서는 만 105세로 남들보다 인생을 덤으로 사셨고, 지난 몇년간 육체적으로 너무 고생하셨으며, 이제는 고통이 없는 천국으로 가셨다는 확고한 믿음이 섰기때문이다. 지금 나는 내가 아는 외할머니를 생각하며 이글을 쓰려고 한다.

 

외할머니의 존함은 홍갑숙 이시고, 1904년 경기도 남양에 있는 남양 홍씨 집성촌의 어느 양반가에서 태어나셨다. 내가 아주 어렸을때 외할머니는 당시 하인이 여러 명 있는 큰 기와집에 살으셨고, 홍난파 선생이 문중사람이라는 이야기도 해주셨다. 외할머니는 학교에 발을 들여놓지 않으셨지만 우리말을 독학으로 깨우치셨고 독서를 많이 하셔서 아주 박식하셨다. 남들은 의례 그분이 이화여전을 졸업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만 15세 때인 1919년 기미년에 외할머니는 가마를 타고 경기도 화성군 파장리에 계신 두 살 어린 외할아버지에게로 시집오셨다.

 

외할머니의 대한 일화나 그분의 지혜로운 행동들은 어머니로 부터 전해들을 수 있었다. 외할머니는 결혼 후 서당에 다니시던 외할아버지에게 신학문을 권유하셔서 만 30세에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하게하시고, 하숙을 치면서 그  뒷바라지를 하셨다.  외할아버지는 대지주집 막내아들로 굳이 공부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외할머니는 당시 노름과 색을 즐기는 양반집 도령으로 전략할 수 있었던 그분에게 꿈을 심어주시고 그것을 이루게 도우셨다. 일제시대 때 와이셔츠가 필요하면 종로2가 화신백화점 매장에 걸려있는 것을 보고 그대로 만들어서 남편에게 입히실 정도로 바느질 솜씨가 좋으셨다. 위기대응 능력도 남다르셔서, 6.25때 피난가면서는 침착하게 집안의 중요한 물건들을 땅에 파묻어서 피해를 줄이셨다고 한다. 1.4후퇴때 대전으로 피난가서는 시장에서 장사를 했었는데, 이윤이 박한데도 사람들이 깍는 것을 경험한 후부터는 절대로 물건값을 깍지 않으셨다. 남의 욕 삼일 안간다고 하시면서 분수에 넘치는 행동은 자제하게 하셨고, 사소한 것도 아껴쓰는 절약 생활을 하셨다. 그러나 좋은 일에 기부할 때는 큰 손이셨다. 외할아버지가 큰 소리로 역정을 내시면 말대꾸를 안하시고 꾹꾹 참으시다가, 모든 것이 잠잠해지고 난 후 기회를 봐서 자신의 의사를 꼭 나타내셨다.그러니까 집안은 늘 평안했고 자식들은 외할머니를 외할아버지 이상으로 존경하였다.

 

외할아버지께서는 세브란스를 졸업하고 함경남도 신창에서 개업을 하시다가 해방후 경기도 안양으로 이주해서 지금 안양 1번지에 있는 유일한 기와집에서 삼성병원을 개업하셨다. 초창기에는 안양에 병원이 몇개 없어서 삼성병원하면 모르는 사람들이 없었다. 의사인 외할아버지 덕분에 가족들은 넉넉한 생활을 하고  교육의 기회를 잘 활용할 수 있었다.  현재 4천명 재적교인이 있는 안양제일교회는 외갓집 안방과 건너방을 터서 예배를 보며 시작했다. 그리고는 외갓집 병원건물 이층에서 예배를 보다가 현재의 자리로 이사했다.  당시에는 외갓집과 교회가 거의 구분이 없었기 때문에 교회일에 외할머니의 손길이 안간 곳이 거의 없었다. 두 분은 비교적 자식농사에 성공했다는 말을 듣고있다. 모두 3남2녀를 두셨는데, 내 어머니가 5남매 중 두 째이며 두 딸중에 맡이시다. 큰 아들은 한국최초로 신장이식수술을 하고 성모병원 원장을 지내신 이용각박사 이고, 둘째 아들 이용기 씨는 미국에서 부동산 중개업을 해서 성공하셨고, 막내 아들은 KT사장을 역임하고 현재 창조한국당 국회의원인 이용경박사이다.  그래도 이분들 중에서 우리가 가장 크레딧을 드려야 할 분은 나의 이모님이다.  그분은 5남매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힘드신 세월을 보냈지만, 몇십년을 매일 24시간 한결같이 외할머니를 보살펴드렸다.


나는 초등학교가기 전 1957-1964까지 안양에 있는 외갓집에서 두 분 밑에서 자랐다. 나에게 형이 있기때문에 어머니의 고생을 좀 덜어드리기 위해서였다. 나는 외할머니가 입으로 씹어서 주는 이유식을 먹고 자랐다. 잠잘때 외갓집 안방에서 외할머니 옆에 누워서 두 분이 이부자리에서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 가족과 교회이야기를 나누시는 것을 귀동냥한 것이 나의 유아교육이었다.  나는 그분들의 대화와 행동을 통해서 옳바른 생활을 배울 수 있었다, 밥상에 앉아서는 외할아버지가 숫갈을 잡으실 때까지 기다렸고, 항상 좋은 것은 외할아버지 몫으로 남겨놓았는데 결국에는 두 분을 통해서 내게 왔다. 럭키치약이 처음 나왔을 때, 외할아버지는 치약으로 외할머니와 나는 굵은 소금으로 이빨을 닦았다. 남편을 위하시는 그분의 모습이 어린 내가 보기에도 좋았다. 외갓집에는 몇백명의 밥을 만들 수 있는 가마솥으로 된 욕조가 있었는데 외할아버지부터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함께 살던 간호원까지 목욕하던 일이 지금도 추억으로 남아있다. 은행사용이 지금과 같이 않던 시절, 외할머니가 절약해서 모은 곗돈을 전달할때면 내 배에 복대를 채워서 보내시기도 했었다. 그렇게 해서 모은 목돈은 교회의 건축헌금과 자녀들의 유학자금으로 쓰였다. 지금 생각하면 동막골에서나 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내가 어렸을때 이분들로 부터 가정교육을 받지않았다면 아마 오늘날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안양제일교회 자리에 약 200평정도 되는 외갓집 소유의 텃밭이 있었는데 외할머니는 그곳에서 밭일을 하시고 집안의 재래식 부억에서 일을 하시느라 허리가 일찍부터 90도로 꺽어지셨다. 그래서 장이나 새벽기도에 가실때면 내 머리에 손을 얹으시고 몸을 지면에서 100도정도 뒤로 제치시며 걸으셨다. 나는 요즈음 GPS같이 그분이 '어디로 가자' 하면 방향을 행선지로 돌렸다. 시장에서 집으로 향할때는 양손에 시장바구니를 들고 외할머니의 손이 머리에서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걸었다. 나는 이것이 비록 쿨(cool)해 보이지 않았어도 사랑하는 외할머니께 효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싫지 않았다. 방학때 안양에 가면 시장에서 살아있는 닭을 사오셔서 머리를 비트는 끔직한 처형식을 하신 후 오랫만에 온 외손자의 배를 채워주셨다. 그리고 어떤 음식이 먹고싶다고 하면 "마침 교인이 음식점을 열었는데 꼭 거기가서 사 먹으라"고 돈을 손에 집어 주셨다. 내가 40대가 되어서 안양을 방문했을때도 서랍에서 만원권을 몇장 꺼내서 내게 용돈을 주시려는 것을 극구 말린적이 있었다. 나는 외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우리가족이 미국으로 이민가던 1975년 외할머니는 만 71세로 허리가 완전히 'ㄱ' 자로 꺽어지신 노인이셨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더 뵙지 못할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매번 한국에 올때 마다 이번이 마지막 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분은 그로부터 33년이 지난 후 내 큰 딸 지연이가 시집을 갔을 때도 살아계셨다. 그래서 언젠가 부터는 한국에 가면 늘 뵐 수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제 외할머니는 안 계신다. 구심점이었던 그분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외갓집 식구들은 아마도 한자리에 모이기 힘들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그분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때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가족간에 화목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믿음생활을 충실히 하는 것을 바라셨다.  비록 이일이 우리에게는 슬프게 다아왔지만, 그분의 뜻대로 생활에 임할 때 멀리계신 외할머니께서는 기뻐하실 거라고 믿는다. 우리 늦둥이 막내가 증조외할머니의 소천을 접하며 앞으로 하늘나라에서 만난다는 소망을 갖고 의연히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고, 그분의 기도유산이라고 여겨졌다.

 

박중련

2009, 5.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