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시 근교 롱아일랜드 Oyster Bay 해변에서 그 부근에 사시는 지창보 (중앙)교수님과 한국서 오신 박원순(오른쪽) 변호사 그리고 나 (왼쪽)
나는 뉴욕아름다운재단이 현재의 모습을 갖기 이전에 회계사로 봉사하면서 관계를 맺었고, 3년전 창립 이사회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뉴욕아름다운재단은 한국아름다운재단의 협조로 미국 뉴욕지역에 설립된 독립 커뮤니티재단이다. 비영리단체인 뉴욕아름다운재단의 모태인 한국아름다운재단은 한국에서 참여연대 사무총장으로 있던 박원순 변호사가 미국에 유학와 있는 동안 이곳 기부문화를 연구하고 고국에 돌아와서 설립했다. 박 변호사는 미국의 United Way성격의 이 재단' 외에, Goodwill Shop과 유사한 '아름다운 가게,' Legal Aid와 흡사한 '동감'을 설립했다. 그리고 사회에 희망을 주는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희망제작소를 설립했다. 이 단체들은 참신한 아이디어 상품개발, 짜임새 있는 경영, 그리고 한가지 일을 시작하면 끝장을 내는 우리의 근성때문에 아직 만족한 상태는 아니지만 어느정도 뿌리를 내렸다. 외국인들이 혀를 내두르는 한국의 쓰레기 분리수거나 세계 첨단인 핸드폰 디자인과 제작기술을 보면, 비록 우리가 늦게 시작했지만 언젠가는 이 재단도 세계에서 주목받는 커뮤니티재단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 뉴욕아름다운재단에는 박 변호사를 포함한 10명의 이사와 2명의 사무국 직원 그리고 약간 명의 인턴들이 있다. 나는 이분들에게서 독재시대 때 순수하게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가졌던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단지 나누면서 아름다운 세상을 구현하려는 목적만이 다를 뿐이다. 이곳에서 아름다운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과 함께 일하면서 뉴욕한인사회가 조금씩 변해가는 것을 보고 보람을 느끼고 있다.
박 변호사는 나보다 겨우 두 살 위이지만 그의 역량과 지도력면에서는 위 사진의 모습과 같이 20년 이상은 차이가 진다. 그는 민주화운동, 사회참여운동, 이웃돕기운동 등에 앞장서서 희생적으로 일하고 결실을 보여주었기때문에 세인으로부터 존경을 받고있다. 내가 그분을 이해하기 까지는 어느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나는 인간관계에서 어느 누구를 대할때 처음에는 "너는 너고 나는 나다"라는 생각을 갖고 시작한다. 남들이 높이 떠받치는 사람도 그러한 인격이 없다고 생각되면 내 기준에 따라 대우해 주고, 세상사람들이 경멸하는 사람도 내가 존경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한다. 뉴욕의 비좁은 재단 사무실에서 아름다운 미래를 구상하고 현안상황들을 논의하면서 자연히 나의 시선은 그를 향할 때가 많았다. 그리고 오늘 그와 하루종일 함께 있으면서 세인의 눈에 비쳐진 박원순씨를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이제 제2, 제3의 박원순 변호사가 나온다면 우리사회는 더욱 아름다워질거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이번 뉴욕아름다운재단 기금마련 갈라를 준비하면서, 또 한 분과의 만남이 나를 설레이게 했다. 오늘 아침 10시에 재단의 최재섭 이사장, 강영주 상임이사, 박원순 변호사 그리고 나 넷이서 뉴저지 주 포트리 시를 떠나 재단의 일에 관심을 보이신 지창보 교수님댁으로 향했다. 댁은 롱아일랜드 북쪽 해변가에서 약간 떨어진 숲이 우거진 곳에 있는데, 뜰이 2에이커 되는 집들이 모인 부자동네이었다. 교수님은 1972년에 페허였던 이 집을 헐값에 사서 입주하셨다고 한다. 교수님 정원은 진달래와 철쭉(교수님은 진달래와 철쭉을 구별하셨다.) 그리고 과실나무가 곳곳에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었다. 어느 정원사가 '자연의 미를 그대로 살린 정원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이라고 한 말이 실감났다. 집 정원은 마치 춘원 이광수 선생이 걸어나올 것 같은 정서적 분위기였다. 집은 약간 오래된 서양식 나무집이었으나 잘 손질되어 있었으며, 실내는 바깥 정원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큰 창문들이 벽을 대신하고 있었다. 내부에는 보기드문 꽃나무들이 화분이나 분재로 담겨져 있었으며, 걸작인 듯한 동양화들이 벽에 걸려있었고, 그리고 책들이 여기저기 수북히 싸여있었다. 가구들은 실용성에 기초해서 손수 만드신 것 같이 넓직하고 투박해 보였으며, 집내부는 창호지 격자창과 대나무로 실내 장식을 해서 한국냄새가 물씬 났다. 우리일행 네명은 그집에 도착하자마자 선생님이 미리 끓여놓으신 차를 대접받았다. 응접실 탁자유리 안에는 교수님이 수채물감으로 그리신 한반도 지도가 펼쳐져있었다. 그 것을 보면서 이분이 평범하신 분은 아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교수님은 1923년 평양에서 태어나 광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중앙대학 예과를 다니셨다. 그러다가 일제에 의해 학도병으로 끌려가 일본 북규슈에서 심한노동을 했고 해방후 11월에 귀국을 했다. 그가 부산항에 내렸을때는 이미 38선이 그어져 있어서 고향에 쉽게 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래서 임진강 변을 통해서 가까스로 평양에 가서 어머니를 만나볼 수 있었다. 어머니께서 교수님의 결혼을 서두르시는 것을 보고 공부가 아쉬어 책 몇권을 들고 고향집에 온 지 10일만에 서울로 떠났다. 서울에서는 연세대학을 다니면서 국대안 반대등 학생운동을 하다가 퇴학당했고 당시 기세가 등등했던 극우단체인 서북청년단에 붙잡혀 구타를 당하면서 간신히 죽음을 면했다. 그후 세브란스 병원에서 소사 노릇한 것이 인연이 되어 1953년 수영비행장에서 노스웨스트 항공기를 타고 고국을 작별하고 일본 동경에 들려서 패국 일본사회의 암흑과 절망속에 헤메이는 사회상을 들여다 봤다. 미국으로 유학와서 듀크대학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웨이크 포리스트 대학과 드류대학을 거쳐 롱아일랜드 대학에서 30년이상을 교수님으로 재직하셨다. 그분은 북한에 두 여동생과 그 가족들이 있을 뿐, 미혼이기 때문에 다른 혈육은 없다. 교수님은 남북한이 냉전에 있었던 1971년과 1973년 그리고 그 후 몇차례 북한을 방문하셨다. 두 번째 방문에서는 가족들을 만나 6.25때 미군의 폭격으로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으셨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당시 교수님은 진보적인 성향때문에 요주의 인물로 분류되어서 1994년 문익환목사 서거 100일제에 참가할 때까지 한국을 방문할 수 없었다. 그분은 윤이상 선생이나 황석영씨와 같이 북한정부가 공식적으로 접촉했던 자유세계의 지식층 중 한 분이었다. 교수님이 이집에 윤이상 선생이 묵으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감회가 깊었다. 내가 하루시간을 보낸것 갖고 그분이 80평생 갖고 계신 깊은 생각을 헤아릴수는 없다. 그러나 그 집을 나오면서 그분이 훌륭한 인격자이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기서 나는 나눔의 철학을 가진 한 지도자가 시작한 운동이 사회를 아름답게 변화시키고 분열된 우리사회를 하나로 묶을 수 있었다는데 고무받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나눔운동을 더욱 확산할 수 있을까? 나눔운동은 내가 집필한 "세계 1%를 꿈꾸면 두려움 없이 떠나라"책에 나오는 필립스 엑시터와 필립스 앤도버의 교훈인 Non Sibi(나를 위하지 않는) 정신과 일치하고 있다. 이 두 학교에서는 '나를 위하지 않는'정신을 강도있게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이 학교출신들 중에는 박원순 변호사와 같은 지도자들도 있고, 그러한 지도자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지지자들도 많다. 만약 한국의 교육부가 의무교육에서 학생들에게 "나를 위하지 않는"삶을 강조한다면 나눔운동이 더욱 가속도를 받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대한민국은 세계를 향해 나눔을 실천할 수 있는 국가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며, 결국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세계가 우러러보고 부러워하는 나라가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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