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시터와 앤도버

졸업식 3장: 엑시터 학생으로서의 마지막 밤 - 졸업식날 일요일 아침예

박중련 2010. 6. 22. 08:52

현열이가 소속되었던 엑시터 축구대표팀 (오른쪽 맨 뒤가 현열) 이글은 모두 5장으로 되어있으며 졸업식 주간의 스케줄을 보내면서 엑시터에서 보낸 날들을 회상하는 글이다. 


    졸업식 전 행사가 하나씩 지나갈 때마다, 엑시터를 곧 떠나게 된다는 현실이 강하게 내게 다가왔다. 엑시터에서는 전통적으로 졸업식 전날 밤에 친한 친구들과 그들의 가족이 모여 함께 식사를 한다. 그날 밤, 이월드Ewald 기숙사의 친한 친구 5명과 그들 가족은 남부 뉴햄프셔 지역에 있는 본타Bonta라는 식당에 모였다. 그곳에 도착해서 나는 식당 뒤쪽의 넓은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서로 선식을 권하고 있었다. 대부분 초면이어서 어색했지만 친구들과 관련된 몇몇 얼굴들이 보이면서 마음이 편안해 졌다.

   친구들은 부모님, 조부모님, 형제자매, 가족 친지 등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을 일요일에 있을 졸업식에 초대했다. 그래서 그곳에는 이들 중 여러 명이 함께 했다. 2개의 긴 테이블이 놓여 있었는데 나와 친구들은 그 중 한 테이블 끝에 자리를 잡았다. 각 좌석 앞에는 ‘축하합니다. 이월드 2007년 졸업생’라고 쓴 특별한 메뉴가 놓여 있었다. 그 표제 밑에 송아지 고기, 소 등심살, 농성어로 구성된 오늘밤의 맛좋은 앙트레 리스트가 눈에 들어왔다. 이러한 음식들은 아주 생소해서 주문할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조금 망설였다. 고심 끝에 나는 농성어를 골랐다. 주문이 거의 끝나가자, 테이블에는 대화의 싹이 텄고 방안의 소리는 점점 커졌다. 친구들과 나는 식사 테이블에서 늘 하던 대로 대화를 주고받았지만 우리 외에는 대화의 흐름이 자유롭지 못했다. 솔직히, 나는 부모님에게 특별히 신경이 쓰였다. 부모님은 처음 보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 그리 사료적인 분들이 아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이 아닌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그분들가장 마지막에 대화에 끼어드는 모습을 보자 내 심장은 뛰기 시작했다.

   나는 부모님 쪽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그분들이 어떻게 대처할지 매우 궁금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분들이 앉아있는 테이블 쪽을 살짝 들여다보았다  . 방 건너 쪽에, 나의 친구 빌Bill의 부모님과 담소하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 부모님의 검은 머리와 검은 눈들은 빌 부모님의 옅은 브라운과 블론드 머리, 파란과 뚜렷이 대조되었다. 그러한 육체적인 다른 점들을 넘어서, 한국에서 온 이민자인 나의 부모님과 미국에서 태어나서 뉴햄프셔 주에 거주하는 빌 부모님의 공통점을 찾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빌 부모님이 말할 때 친절한 미소와 머리를 끄덕이며 답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나의 뛰는 가슴은 안정되기 시작했다. 아빠도 거의 비슷하게 행동했지만 주로 말로만 답하려고 하였다. 그분들의 대화가 비록 섣부르게 보였지만, 결국에는 그 진가를 인정할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의 부모님과 빌의 부모님은 공통점이 별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들은 모두 다 자신의 아들들을 서로의 귀중한 친구가 되게끔 성장시켰다. 그분들의 대화가 그날 밤 내내 지속되면서 이 유대관계가 그들의 물리적이거나 문화적인 차이점들보다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모임이 끝나자, 학생들을 위해 두 번의 건배와 학생들의 몇 마디 답사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기숙사에 준비된 후식을 먹기 위해, 더욱 중요하게도, 엑시터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기 위해 기숙사로 향했다. 우리 중 몇 명은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밖으로 나갔고, 다른 친구들은 기숙사에 남았다. 우리가 어떻게 보냈든, 그 날은 엑시터 학생으로서 만끽한 마지막 밤으로 우리 모두에게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다음날 아침, 나는 아침 7시를 알리는 자명종 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기숙사의 다른 졸업반 학생들은 대부분 깊은 잠에 빠져있다. 그들은 졸업식장에 들어가야 할 시간인 아침 9시45분에 정확히 맞춰 늦지 않게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그날은 주일이어서 나는 부모님과 아침 8시에 필립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기로 다. 예배가 졸업식 바로 전이어서, 나는 졸업식 때 입을 정장을 하고 교회로 가야했다.

   졸업식 복장규칙은 여학생들은 하얀 드레스이고 남학생들은 셔츠, 타이와 양복상의다. 나는 엑시터에서 4년을 보내면서 매일 셔츠와 타이를 착용해 왔다. 그러나 한 번도 이날처럼 세련되게 보이려고 노력한 적은 없었다. 12학년 봄 학기가 끝나가고 졸업식이 다가 오면서, 나는 새 의복을 긴박 장만해야 했다. 1년 내내 신어서 낡아 빠진 팀버랜드 장화는 반짝이는 신사화로, 소매가 2인치쯤 짧아진 낡은 양복상의는 잘 맞는 것으로 갈아야 했다. 이 새로운 것들은 비닐 덮개로 조심스럽게 싸여진 채 일요일 아침까지 내 옷장에 걸려 있었다. 드디어 잘 맞는 양복 상의에 내 손을 집어넣고 빛나는 새 구두에 내 발을 쑤욱 밀어 넣는 순간, 이날의 중요성이 확 살아났다.

   나는 아침 8시 10분에 기숙사 앞에서 기다리는 부모님을 만나 서둘러 필립스 교회로 뛰어갔다. 예배에 늦었기 때문에 우리는 예배당 뒤쪽 좌석을 택했다. 자리에 앉을 때 나의 친구인 크리스천 펠로우십 공동회장이 청중을 향해 간증을 하고 있었다. 예배당 맨 앞에 앉아 있는 연설자들을 보면서, 나는 이 예배가 평상시와 다를 것을 알 수 있었다. 톰슨 목사님은 학교 내 여러 종교 학생지도자들을 초청해서 청중들에게 마지막 연설을 하게 했다. 목사님은 내게도 그 기회를 주었지만, 아침 일찍 오지 못했기 때문에 그냥 뒤에서 청중들에게 끝맺는 소견을 말하는 친구들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교회 안을 둘러보자, 참석자들은 대부분 어른들이거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었다. 엑시터에서는 수업이 일반적으로 아침 8시에 시작하지만, 모교에서의 마지막 날을 보낸 학생들에게는 아침 8시 예배가 분명히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배커로리어트 예배 때와 같이 다른 신앙을 가진 학생들이 자신들 종교의 구문을 읽고 간증을 하였다. 모두 이야기를 마쳤을 때, 톰슨 목사님은 청중들에게 자신들 마음속에 있생각을 나누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가 초청장을 내 놓았을 때, 무언가 내 마음을 흔들었으며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필립스 교회 청중들 앞에서 연설하게끔 나를 충동하였다. 대본 없이 나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정확한 단어와 문장을 떠 올릴 수는 없지만, 나는 그 주의 다른 많은 것들과 같이, 당시의 독특한 감정을 기억한다. 그날 아침, 나는 한 주간 지속된 고마운 마음에, 약간의 슬픈 느낌을 더해서, 내 삶에 영향을 준 교회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