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시터의 아카데미 빌딩 정문위에 세겨진 "소년들아 이곳에 오라, 그러면 사나이가 될 것이다.
( ‘Come hither, boys, that you may become men.")"
현열이가 12학년 가을 트라이메스터를 마치고 겨울방학에 집에와 있는 동안 우리 부자는 교회에서 기획하는 뮤지컬에 함께 출연하였다. 예수님의 생애라는 대형 뮤지컬이었는데 그해에는 윤복희 씨가 막달라 마리아 역으로 특별출연을 했다. 나는 예수님에게 거듭나는 것에 대해 묻는 니고데모 역을, 현열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왼쪽 편 십자가에서 축음을 맞이한 나쁜 강도 역을 맡았다.
연습을 마치면 이미 자정 무렵이었다. 늦은 밤 1시간 동안 에드라이트에만 의지해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마치 세상에 우리 두 부자만 있는 느낌이 들었다. 피로했지만 오랜만에 부자가 함께 하는 귀한 시간이었다. 아들이 어렸을 때 유소년 축구시합을 위해 장거리를 달리며 둘이 함께 보낸 정다운 시간들이 떠올랐다. 나는 문득 아들이 보딩스쿨에서 인각ㄴ관계 때문에 힘든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다. 그는 한 번도 부모에게 그런 어려움을 호소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학교에서 매일 대하는 사람들, 특히 선생님이나 코치들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해결하는지 물어 보았다.
현열이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내 질문에 약간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자신에게도 그런 힘든 순간들이 있었다고 했다. 엑시터에는 교사와 학생이 1300명쯤 된다. 그 안에서 3년 반을 지내면서 모든 결정을 자신이 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엑시터는 문제가 있으면 대화를 통해 해결하도록 북돋워주는 분위기이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가면서 자신도 모르게 성숙해질 수 있었다고 한다. 또 그 순간 자신이 크리스천인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자신은 상대방이 듣기에 거북할 수 있는 말을 하기 전에, 그를 사랑으로 대할 수 있고 자신의 진심을 이해해 주기 바라는 기도를 했다고 말했다. 눈 감고 잠깐 하는 기도가 아니라 정말 깊은 묵상에 감기며 하는 기도였음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절대 상대방에게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했다. 엑시터에서 현열이가 터득한 사랑의 원칙이었다.
"아빠, 내가 엑시터에 지내면서 의견 차이가 있는 사람들마다 감정적으로 대했다면 아마 모든 사람을 적으로 만들었을 거예요, 그랬다면 나의 학교생활은 비참했겠죠."
현열이는 상대가 아무리 높고 책임 있는 직위에 있어도, 자신의 모습에서 본인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느낄 수 있으면 그 사람은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는 사실을 터득했다고 한다. 그러나 감정적으로 접근하면 절대로 논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점도 지적했다. 자신이 틀렸고, 상대가 옳다는 것을 알았다 해도, 감정을 앞세운 상황에서는 절대로 시인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상대가 자신의 말을 듣기 싫어할 거라고 생각하며, 노력도 하지 않고 미리 대화를 포기한다면, 그것은 상대방에게 무관심한 것이고 미움보다 더 나쁜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과 가장 독선적인 사람이 논쟁을 하면 전자가 이긴다는 것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도 9-10학년 때 능력이 뛰어난 동료들에게 마음의 문을 닫은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자신은 그 친구들이 잘난 척 한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본인이 자신없고 불안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제는 아들은 그들과 친한 친구로 지낼 만큼 성숙해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고학년이 되어 후배들에게 그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조언을 줄 때에도 항상 같은 마음가짐으로 임했다고 한다. 그럴 때 상대방이 약간의 거부감을 느끼더라도 나중에는 자신의 진의를 알고 고마워할 것을 믿었다.
실제로 현열이는 엑시터를 졸업한 지 한 달 뒤, 1년 후배인 한 백인 학생으로부처 정성스럽게 쓴 편지 한 통을 받았다. 편지 내용은 본인이 철이 없어서 현열에게 잘못된 행동을 했던 것에 대해 용서를 빌고, 현열이가 그러한 가운데서도 자기에게 좋은 조언을 해 주었던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이 사건으로 현열이가 자신이 생가하는 대인관계 철학을 직접 실천하고 살아 왔다는 데 놀랐고, 그 후배도 현열이의 진실된 생각을 받아들이고 고마워했든 것과 굳이 할 필요 없는 용서를 구하는 편지를 쓴 용기에 더욱 놀랐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진실이며 그 것을 전하는 방법이 비록 껄끄럽더라도 거짓을 화려하게 포장한 것보다는 훨씬 설득력이 있다. 듣는 사람은 그 사람이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느낌으로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진실을 성실하고 매너 있게 전달할 수 있다면 그 메시지는 폭발력을 갖게 된다.
엑시터는 인성교육을 통해서 이런 면들을 생각하게 하고, 하크네스 테이블에서 효과적인 의사전달 방법을 배운다. 현열이는 보딩스쿨이라는 작은 세계에서 인간관계의 복잡성을 미리 경험했고, 그것을 해결해 나가는 방법을 터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