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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1%..."책의 주인공 Albert Pak(박현열)의 10년 후 모습

박중련 2018. 4. 7. 00:18

 

 

현열이가 2007년 Phillips Exeter를 졸업할 때 그의 4년간 보딩스쿨 생활을 다룬 "세계 1%를 꿈꾸면 두려움 없이 떠나라 "라는 책이 나온지 어언 10년이 되었다. 세계 1%란 말은 정말 1%의 주옥같은 사람이 되라는 뜻이었으나, 일반 독자들은 최고 명문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나와 월가에서 연봉 수백만불을 받는 Investment Banker나 IT회사 Google과 Facebook의 죄고 경영진 등을 생각했었다. 10년 후 "현열이가 어떻게 변했을 까?" 독자들 모두 궁금해 할거라고 생각된다.

 

답부터 말하자면, 현열이는  지금 "세계 1%"의 인생을 시작하는 시점에 와 있다. 올해 30살인 그는 유펜법대와 프린스턴 우드로우 윌슨 행정대학원에서 거의 풀 장학금을 받았으며 이번 6월에 JD와 MPA를 받고 졸업한다. 그는 미국 3대 로펌인 Skadden(스케든)에서 법대 졸업예정자와 연방판사의 Clerk들을 대상으로 매년 미전역에서 30명을 뽑는 Skadden Fellow에 선발되었다. Skadden Fellowship은 공익변호사를 꿈꾸는 법대학생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다. 그는 디트로이트 빈민가의 커뮤니티 센터에서 2년간 스케든재단으로부터 최소한의 생활비를 보조받으며 변호사 생활을 시작한다. 스케든펠로쉽은 일반적으로 변호사의 평화봉사단이라고도 한다. 스케든펠로우가 갖는 의미는 그동안 이 프로그램을 거쳐갔던 800여명 삶의 행적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대부분이 우리 사회에서 버림받고 차별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미국 전역에서 비영리단체 지도자로 생활하고 있으며, 일부는 법대 교수(12%)나 공무원(13%)으로 일을 하고 있다. 펠로우쉽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워싱턴DC의 Covington로펌에서 근무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는 한 번 내디디면 다시 돌아오기 힘든 미국 유명 로펌근무와 봉사하는 삶의 갈림길에서 후자를 택했다. 

 

부모마다 자녀가 잘되길 바라는 마음은 한결같지만 자녀교육에 대한 방법은 다를거라고 생각된다. 나의 경우는 먼저 현열이의 소질, 능력, 적성을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그가 처음으로 참가했던 동네 레크레이션 축구에서 종횡무진으로 활약했을때, 나는 축구에서 가능성을 보았다. 그래서 여러 축구캠프에서 훌륭한 코치밑에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한국에서 월드컵을 개최했을 때는 학기 중인데도 7학년인 아들 손을 잡고 한국과 이태리게임을 보러 2박3일 다녀 왔다, 안정환이 헤딩으로 이태리의 골망을 갈랐을 때 그곳 바로 옆에서 모르는 동포들을 붙잡고 환성을 지르던 추억은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9학년 여름방학 때 홀로 볼리비아의 타후이치 유소년 축구캠프에 가서 모래 백사장을 맨발로 뛰던 혹독한 훈련도 돈주고 살 수 없는 경험이었다. 뉴햄프셔주 축구대표팀 U17 축구연습 2시간을 위해 뉴저지주에서 아들과 하루 12시간을 왕복해서 다녀왔는데, 우리는 좁은 자동차 공간에서 마음껏 부자의 정을 나눌 수 있었다. 나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그에게 값진 배움과 경험의 기회가 있으면 놓치지않고 극대화하는 노력을 했다. 

 

남미와 아프리카 선교여행을 통해서는 어렵게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직접 경험하면서 그의 인생관과 가치관이 크게 성숙해 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케냐의 마사이족 선교지에서 선교사님이 염소의 꼬인 창자와 고무같이 생긴 위를 '먹어 볼래' 하며 권했다. 움칙했으나 그 순간 어린아이들의 시선이 자기를 향하기 시작하며 그 질문의 중요성이 점점 더해가는 것을 느꼈다. 잠시 자신이 취해야 할 처신을 고민하다가 그 걸 한 입에 넣고 게걸스럽게 먹었다. 우뢰와 같은 함성이 터져나왔다. 그는 대학입시 에세이에서 비록 설사로 뒷간을 자주 가야 했지만 그 대담한 첫 한 입으로 그들과 우정을 나눈 경험을 무엇과도 바꾸지 않겠다고 했다. 공부는 살고 있는 동네에서는 top 수준이었지만, 엑시터에서는 30%정도 등수에 드는 비교적 평범한 보딩스쿨 학생이었다. 그곳에서 배운 엑시터교훈" 나를 위하지 않는" 은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아빠의 모교인 유펜 와튼학부와 문리과대학 동아시아학 복수학위 프로그램에 들어가서 학생대표 임원으로 유펜학생회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동아시아의 정치, 경제, 역사를 심도있게 배우기위해 매년 여름방학때마다 중국과 한국을 방문했다. 대학 2학년때는 북경사범대학 중국어 프로그램에 다니면서 기숙사에서 빨래판으로 자신의 옷을 빨아입기도 했다. 길림성 훈춘시에서 장애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인근의 백두산에 올라가 천지를보며 감격에 젖기도 했다. 고려대학에서 한 학기 교환학생으로 있을 때는 고연전의 열기도 느껴보았고, 친구들과 당구장에서 짜장면을 시켜놓고 하얀 목장갑을 끼고 당구를 쳐보는 경험도 했다. 나는 현열이에게 연결해 줄 수 있는 한국의 지도자들로 부터 권면의 말씀을 듣게했는데, 그때 고마운 마음을 전하기위해 내가 직접 스케치한 초상화를 액자에 담아 전하게 했다. 유펜에서 배운 동아시아 근대사 지식을 갖고 방학때 마다 중국과 한국 곳곳을 방문해서 역동적이고 어두운 양면 모두를 피부로 접하고, 그 나라에서 대학생활을 하면서 입체적이면서도 살아있는 공부를 할 수 있었다.

 

현열이나 우리부부 모두 완벽한 사람들이 아니다. 지나간 시간을 돌이켜보면 우리 나름대로의 심각한 일도 있었으나 그러한 것들은 극복하면서 우리에게 더 많은 배움의 기회를 주었다. 현열이의 경우 남보다 더 좋은 체력조건과 재능을 갖고 태어난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어린 그가 혼자서는 알지 못하는 선택을 소개해주는 데 까지만 했고, 원할 때 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그러한 것은 경제적 부담이 돼지않고 마음과 관심 그리고 약간의 시간만 투자하면 된다. 경제적으로 중류에 속하는 우리가족에게 엑시터나 유펜은 기대 이상의 장학금을 주어서 학비도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재미난 에피소드를 소개하자면, 현열이가 초등학생때 가족과 함께 아빠 유펜친구집에 초대받아서 가면, 고급차들이 파킹되어있는 큰 맨션앞에서 내리곤 했는데, 그때 자신보다는 아빠가 받을 당혹감을 더 염려했다고 한다. 현열이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부유하지 않기 때문에 받을 수 있는축복이다. 이 이야기는 엑시터에서 12학년때 자신의 인생에 가장 영향을 준 사람이나 사건에 대한주제를 다루는 Meditation (명상)이라는 에세이에 일부 소개되었다. 외부적인 결정들은 아빠인 내가 도왔지만, 집안 내부적으로는 학교가 파할때 엄마를 보고 달려오는 순간부터 숙제를 마치고 취침할 때까지 함께 한 아내의 따뜻한 배려와 손길이 그의 안정적 성장에 영향을 주었다.   

 

최근에 뉴욕지역의 스케든펠로우들을 위한 만찬 모임이 있었다. 그를 인터뷰했던 고위 관계자가 반갑게 맞이하면서 느닺없이 "미국에서 태어났냐?"는 질문을 던졌다. 거기까지 전해들은 나는 혹시 현열이가 한국가정에서 자라서 "액센트가 있다."는 말로 생각했다. 그 다음에는 아주 황당하게 대화가 진행되었는데, "그렇다"고 하니까, "그럼 너는 앞으로 미국대통령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가끔 법대와 행정학을 병행하기 때문에 정치인이 될거냐는 질문을 받기는 했지만, 한 번도 정치에 대해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그의 눈을 마주보면서 조크가 아닌 것을 확인하고는, 앞으로 실망시킬 일 밖에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고마움 보다도 오히려 부담감이 앞섰다. 스케든펠로우 중에 현재 뉴저지주 연방상원의원인 코리 부커가 있다. 그는 스탠포드학부, 예일법대, 로즈스칼라을 거쳐 스케든펠로우를 지냈으며 차기 대통령 후보로도 거론되는 인물이다. 아마도 그가 인터뷰에서 현열이를 인상적으로 봤고 훌륭한 사람이 되길 바란다는 정도의 의미였다고 생각된다.

 

현열이는 자신이 다닌 대학과 대학원 어느 곳에서나 적당히 공부를 하고도 상위성적을 유지하고, 상당히 많은 시간을 봉사와 학생활동에 할애하는 학생이었다. 만약 공부에만 매달렸으면 더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겠지만, 그건 그가 바라는 삶이 아니었다. 학부 졸업 후 대학원입학 전까지는 필라델피아의 저소득층 지역에 있는 한 고등학교에서 대학입학을 돕는 봉사단체인 12+에서 2년간 full-time으로 일을 했다. 어느 지역에서 살든지 그는 봉사단체를 기웃거리며 자신이 어떻게 하면 도울 수 있을 까를 생각하는 젊은이였다. 나는 항상 현열이에게 어떤 일을 하던지 상대방에게 감동을 주어야 한다고 말을 한다. 변호사일을 하면 의뢰인에게 봉사자이면 피봉사자에게 감동을 주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너무 쉽고 편하게 살고 있다면 세상에 우리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할 때 무언가 잘못된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나는 그가 아빠 나이쯤 되었을때 ,자신이 걸어온 삶을 돌아보면서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한" 삶이 아닌 "나를 위하지 않은"삶을 살아왔다고 느낄 수 있을때 정말 행복할 거라는 말을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