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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열이가 결정한 대학원 진로

박중련 2014. 4. 17. 22:57


한 5,6년전에 고등학교 선배로부터 나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으로 이민오신 모교 양정고의 수학선생님 아드님이 프린스턴의 Woodraw Wilson School of Public and International Affairs ('윌슨스쿨')과 컬럼비아법대를 졸업하고, 로펌을 거쳐 연방상원 은행재정분과위원회에서 일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 분의 성함은 Charles Yi로 초등학교 때 미국에 와서 UC Berkeley에서 ROTC를 마치고 이라크에 파병되어서 5년간 장교로 복무했다. 그는 미국 재무부에서 Deputy Assistant Secretary(한국의 기재부 국장급)를 거쳐 현재 연방상원 은행재정분과위원회의 수석 고문변호사겸 Staff Director로 있다. 그냥 지나쳐 들을 있는 이야기였지만 그 융합프로그램이 미국의회와 행정부 커리어에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이 내게 인상적으로 남아있었다. 나는 Charles Yi 이야기를 현열이에게 했었기에, 그가 윌슨스쿨과 컬럼비아법대에 합격한 순간 Charles와 비슷한 길을 가려고하지 않나 생각했었다.


나는 멀찌감치서 둥지를 지키는 아빠 부엉이같이, 현열이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항상 살피고, 그가 원하는 것이 교육적으로 유익하다는 판단이 되면, 시공을 초월해서 경험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가 10살때 동네 레크레이션센터의 축구게임에서 볼을 갖고 종횡무진 누비는 모습을 보고는 당장 축구캠프에 연결시켜주었다. 15살때에는 볼리비아에 1달 이상을 민박시키며 펠레도 극찬한 스파르타식 트레이닝으로 유명한 Tahuichi 축구캠프에 보냈다. 어떤 때는 뉴햄프셔 주 청소년 선발팀 연습 단 2시간을 위해서 하루 왕복 12시간을 운전하기도 했다. 이렇게 단둘이 장거리 운전을 할때면 이런저런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우기도 하고, 심각한 이야기도 나누며 부자간의 정을 돈독히 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현열이는 뉴저지 주와 뉴햄프셔 주의 유소년 축구대표팀에 선발되었다. 그가 14살때인 2002년 월드컵 때는 둘이 손잡고 금요일 저녁에 한국가는 비행기에 탑승해서 한국과 이태리게임을 보고 다음날 월요일에 미국에 돌아오기도 했다. 그때 현열이는 안정환의 헤딩슛을 100 미터앞에서 직접 목격하고 모르는 관중들과 서로 껴안고 환호성을 지르는 경험을 했다. 그는 그 순간을 기억하며 썼던 에세이에서 "그동안 재미동포로 살면서는 느끼기 힘들었던 진한 동포애와 같은 조상을 가진 한국인으로서의 동질성을 경험했다."고 표현했다. 


현열이가 중학생일때 그를 프린스턴대학출신 어느 흑인 선생님에게 책을 읽고 독후감발표와 작문을 하는 tutoring 시킨 적이 있었다. 그 선생님은 현열이를 대하더니 대뜸 필립스 아카데미에 보내라는 제안을 했다. 얼마 후 존스홉킨스 영재프로그램인 CTY 에서 그 학교 출신의 성숙하고 학업능력이 뛰어난 , 누나들을 보고 스스로 지원하고 싶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  현열이는 필립스 아카데미의 엑시터와 앤도버 두 학교 중 엑시터를 선택했다. 학생 천 명에 10억불 재단을 보유한 필립스 엑시터는 현열이에게 거의 전액 장학금을 주었다. 현열이는 평범한 동네 고등학교 대신, 전 세계 곳곳에서 온 다양한 배경을 가진 우수한 학생들과 함께 엑시터에서 소크라테스식 토론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Facebook 저커버그가 그의 5년 선배이고다빈치코드의 작가 댄브라운이 학교 선배이자 그곳 영어선생님을 지냈다. 그냥 스쳐버릴 수도 있었던 tutor 선생님의 제안은 현열이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은 단초가 되었고, 그 어느 교육과도 다른 엑시터교육을 받을  있었다. 무엇보다도 엑시터의 '나를 위하지 않는 (Non Sibi)' 교훈은 그의 가장 중요한 가치관으로 자리잡았고, 대학 졸업 후 사회생활과 대학원 진학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


엑시터 못지않게 현열이에게 영향을 미친 곳은 이글장학재단이다. 나는 지인으로부터 이 재단에 대해서 듣고 그에게 지원을 권유했다. 그때는 이재단이 장학금 주는 것 외에 그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줄 지 전혀 알지 못했다. 이 재단은 뉴욕에서 2시간 거리에 있는 모든 학생들에게 지원자격을 주었는데, 대학 4년간 연 최고 1만불까지 장학금을 주었다. 이글장학재단은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만들기 위해 학생들을 준비시키는 것이 모토이다. 여기서 말하는 더 나은 내일은 학생들이 능력을 키워 더 좋은 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하는 것을 뜻한다.  매년 10여명 학생들을 선발해 선후배를 연결해서 멘토와 멘티의 관계를 맺어주고, 장학금 지급과 연계해서 자기 능력개발을 요구하고 모니터했다. 예를 들면 지도력발전을 위해 1학년때는 대학동아리나 학생회에 멤버로 들어가고, 2학년때는 좀더 의미있는 업무를 수행하고, 3학년에는 부회장, 4학년에는 회장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매주 커뮤니티 서비스를 하게하고, 스스로 더나은 학생이 되기위해 10여 가지 목표를 정해놓고 실행하도록 요구했다. 예를 들면 매일 학교식당에서 새로운 친구에게 자기소개를 하며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든지, 매일 교실에서 한 번 이상 손을 들고 질문을 한다든지, 자신이 취약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고쳐나가게 했다. 그리고 매년 재단이 추구하는 목적과 부합하는 베스트셀러 책을 한 권 지정해서 읽히고 독후감을 제출하게 했다 이 재단출신들은 모두 명문 대학원에 진학해서 사회의 지도자로 일하고 있다. 


현열이는 필립스 엑시터를 졸업하고, 유펜의 와튼스쿨에서 재정학과 문리과대학에서 동아시아학을 복수전공했다. 그는 유펜에서 1만2천명 학부학생들의 대표격인 유펜대학의회 30명 대의원의 일원으로 학생들의 요구사항을 대학에 전하는 일을 했다. 고려대학에 교환학생으로 간 해를 제외하고는 3년간 매년 선거를 치루고 당선되었다. 대학교 2학년때는 미국 동포최대의 대학생모임인 KASCON을 유펜에서 주관했을때, 프로그램 매니저로 미국 주류사회에서 활동하고있는 동포 지도자들의 섭외와 스폰서모집, 대학생 참가자 유치를 위해서 열심히 뛰었다이 모임은 KASCON 역사상 가장 성대히 치러졌고 흑자를 내어서 다음 이 행사가 지속적으로 유지되는데 도움을 주었다. 유펜학생 의회와 KASCON 프로그램 매니저 활동은 그를 public service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했다. 수줍음을 타는 현열이가 대학에 들어가자 마자 대학의회 일학년 대의원에 출마해서 500표 이상을 받은 것과 후에 커미티 의장을 한 것이며, KASCON의 중책을 맡은 것도 모두 더 나은 사회를 구현하기위해 능력개발을 요구하는 이글재단의 영향이 컸다. 

 

나는 동아시아학 전공인 현열이에게 체험을 통한 교육을 받도록 적극 권했다. 일학년 여름방학 때는 프린스턴대학이 주관하는 북경사범대학 여름중국어학교인 Princeton in Beijing프로그램에 다니면서 중국인의 삶을 볼  있었고, 프린스턴 학생들과도 친분을 맺을 있었다. 베이징 올림픽과 상하이 국제박람회를 직접 관람했고, 이듬해 여름방학에는 연변의 조선족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대학교 3년때는 고대경영학과 교환학생으로 있으면서 한국역사와 기업경영에 대해서 공부했다. 그는 중국을 배낭여행하고 한국 곳곳을 두루 살펴보면서 책에서는 접할 수 없는 현지인들의 삶을 경험했다. 북경사범대학 기숙사에 살면서 빨래판에 빨래를 했던 경험과, 고대 친구들과 손톱이 나오는 목장갑을 끼고 당구를 치면서 자장면을 시켜 먹던 일은 그에게 아주 독특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는 유펜으로 돌아온 후 중국어를 하고싶으면 차이나타운의 중국인 이발사를 찾아가는 소박하면서도 엉뚱한 행동으로 우리의 웃음 자아내게했다.


대학 3학년 여름방학 때는 한국에 있는 국제컨설팅회사인 Oliver Wyman에서 인턴생활을 하면서 비즈니스 세계에 대한 첫 실무경험과 한국의 직장 문화를 익혔다. 나는 그가 한국에 있는 동안, 내가 존경하는 지인들의 소중한 경험과 인생에 대한 조언을 듣도록 했다.  그분들 중 현 서울시장인 박원순 씨와의 만남은 현열이가 가게 될 인생항로와 상당히 겹치는 부분이 있어서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http://www.wonsoon.com/902#comment3825  대학 졸업 후에는 Oliver Wyman 뉴욕본사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는데, 왠지 기업문화가 그의 적성에 맞지 않는듯 했다. 그가 다음 택한 직장행보와 대학원 선택과정을 보면 컨설팅회사가 얼마나 그를 숨막히게 했을지 추측할 수 있다. 현열이의 엑시터 친구들도 Oliver Wyman에서 일하는 그를 보고 public service가 아닌 비즈니스에 있는 것을 의아해 했다. 공공이익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은 특이한 DNA를 갖고 있는지 남들에게도 다르게 보여지는 것 같았다. 그는 컨설팅회사에서 1년을 채운 후 필라델피아시에 있는 비영리교육단체인 12 Plus에 둥지를 틀었다.  이 단체는 미국 하원의원 선거구 중 밑에서 두 번째로 가난한 필라델피아시 북부의 한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희망을 불어주며 대학진학을 지도하고 있다.


12 Plus 동영상


당시 유펜선배 2명이 연 몇 천불 예산을 갖고 운영하고 있었는데 도약이 필요한 시점이었고, 현열이가 가세함으로서 활기가 붙었다. 마약과 범죄가 만연했던 이학교는 졸업생의 10%정도가 대학진학 했는데, 2년만에 진학율을 50%로 끌어올렸고, 현열이가 합류한 후에는 70%까지 더 올라갔다.  이 일은 대학진학율 통계만 높이는 단순한 일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학생들에게 교육의 필요성을 인식시켜주고, 대학갈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며, 방법을 제공해주고 지도하는 고등학교 4년을 한 사이클로하는 프로젝트이다학생들의 사회관이 점점 긍정적으로 변하고 학생들이 희망을 갖게 된 것은 대학진학율 증가보다 더 큰 수확이었다. 현재는 기존리더 2명 외에 사이트디렉터 2명, Fellow 6명으로 불어났고, 인근의 다른 고등학교도 자원해서 이 프로젝트로 들어왔다. 이제는 필라델피아에서는 Teach for America 에 버금가는 교육관련 비영리단체가 되었다. 워싱턴 D.C.의 유명 로펌인 Covington & Burling에서 일하는 누나 지연이가 최근에 12 Plus를 잠시 방문했었다. 지연이는 뛰어난 12 Plus 스탶들의 학생들에 대한 사랑과 열정, 꿈을 품고 그들의 지도를 잘 따르는 학생들, 현열이의 누나라는 것을 알고는 교장선생님부터 청소부 아주머니까지 함박웃음으로 반기는 모습을 보고 동생이 무척 자랑스러웠다고 한다. 현열이는 12 Plus에서 2년간 일하면서 앞으로의 인생항로를 어렴풋이 그려보았다.  대학 졸업한지 3년째 되면서 그는 대학원에서 재충전하는 것을 심각히 고민해 보았다.


현열이는 가끔 '나는 한번도 지식의 바다에 빠져본 적이 없었다'라는 말을 하곤 했다 적당히 해도 어느 정도 잘했고, 더 공부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그러나 그는 대학원에 가서는 정말 좋아하는 분야에서 열정을 갖고 밤을 새우며 공부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이번 대학원 진학이 주는 의미가 상당히 크다. 그는 일단 행정대학원과 법대 두 곳의 융합프로그램에 지원하기로 했다. 행정대학원으로는 프린스턴의 윌슨스쿨과 하버드의 Kennedy School of Government('케네디스쿨')에 지원했고, 법학대학원으로는 미국의 top 14 로스쿨에 지원했다.  일단 법대에서 2년을 보내고, 행정대학원 1년반을 재학한뒤, 다시 법대에서 1학기를 마치고 학위 두개를 받게 된다.


케네디스쿨은 주로 국내문제를 다루는 반면윌슨스쿨은 학교 이름 International Affairs 가 말해주듯이 국내와 국제문제를 골고루 다루고 있다. 케네디스쿨은 한 학년 정원이 200여명이고 학생들에 대한 재정보조가 부족하지만, 윌슨스쿨은 정원이 85명으로 소수 정예이고, 거의 모든 재학생들에게 전액 장학금과 생활비를 지원해준다.  두 학교의 합격생 초청 오리엔테이션에 갔다 현열이는 윌슨스쿨이 유펜의 와튼스쿨처럼 프린스턴의 주력 대학원이라는 인상을 받은 반면, 케네디스쿨은 하버드에서 법대와 경영대학원의 그늘에 가려진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케네디스쿨이 위치한 보스턴의 역동적인 삶이 아쉬웠지만, 전액장학금과 생활비를 보조해주고 그날 온 초청학생들을 감동시킨 윌슨스쿨로 행로를 정했다. 사실 그 자신의 앞날에 대해 로스쿨보다도 윌슨스쿨에 거는기대가 컸다. 특히 대형 로펌에서 회사법(corporate law)을 다루는 자신을 상상하며 한 숨을 쉬었던 그 였기에, 상대적으로 매력있는 윌슨스쿨의 2년과정을 1년 반만에 마쳐야 하는 것을 매우 아쉬워했다. 


로스쿨 입학원서에 나타난 현열이의 유펜학부성적은 최상이었고, LSAT성적은 top 1%이었다. 어느 로스쿨이나 지원할 수 있는 성적이었는데, 지원 후 결과는 스탠퍼드와 하버드에서 대기자명단에 올랐고, 컬럼비아, 시카고, 뉴욕대 등에서 합격통지서를 받았다. 유펜, 노스웨스턴, 코넬에서는 거의 전액 장학금을 받았다. 참고로 스탠퍼드와 하버드의 대기자 수는 각각 20명과 150명 정도이고 이안에서 약 15%내지 20%가 합격자로 다시 추려진다. 숨막히게 돌아가는 법대입학처들의 신입생 유치활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느날 유펜에서 현열이에게  학년에 6명에게 주는 Toll Public Interest Scholars Program에 선발됐다고 알려왔다. 3년동안 155천불 장학금을주고 방학때는 public interest organizations에서 인턴을 하고 졸업과 동시에 그 분야로 나가는 프로그램이다. Public interest law는 서민들을 위해서 법률도움을 주는 Legal Aid, 인종차별이나 성차별으로 부터 보호해주는 ACLU와 NAACP,  변호사비가 없는 범죄자들을 위한 국선변호인, 또는 공무원인 검사를 포함한 사회의 공공이익을 위해서 일하는 법률분야를 말한다. 이 장학금을 받으면 졸업 후 3년간 이분야에서 일을 해야 한다.   제안은 48시간 안에 결정해야하기 때문에 가족들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어떻게 해야 할지 기도를 부탁했다. 그가 원하던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에 자신은 단번에 결정을 했겠지만, 가족에게는 조금 차분히 기도한 자신의 결정을 받아주기를 바란것 같았다.   


 

결론적으로 현열이는 앞으로 4년간 유펜법대와 프린스턴의 윌슨스쿨(행정대학원)에서 거의 전액장학금을 받고 공부할 수 있게되었다. 그리고  그가 현재 몸담고 있는 비영리교육재단인 12 Plus에 계속 도움을 주며 공부할 수도 있다. 그가 택한 길은 고액의 연봉을 받고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는 회사법과는 거리가 먼 사회의 어두운 곳에 법의 빛을 비쳐주는 public interest law 와 공공정책을 결정하는 행정분야이다. 어느날 현열이는 이런 날이 올거라고 생각했던지 엄마에게 정말 잘해주고 싶었는데, 그럴수 없을 것 같아요.”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는 어렸을때 아빠가 고집해서 구입한 현대차를 타고 다니면서, 벤즈를 보면 엄마에게 저 차를 꼭 사주겠다는 말을 종종 했었다. 대학을  나와서 입사한 연 10만불 받던 컨설팅회사를 뛰쳐나온 이듬해에는 1천불 소득보고를 했는데, 그의 모습은 전보다 훨씬 행복해 보였다. 그러나 안스러워서 그가 집에 왔다가 떠날때면 용돈을 손에 쥐어주기도 하는데, 이럴때면 서로 "현열아 여기," "괜찮아요" 라는 말을 몇번 주고받아야 했다. 현열이는 자신의 결정을 우리에게 전화로 알려주면서 엑시터의 Non Sibi 정신을 늘 마음에 담고 살아왔으며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그에게 가장 큰 행복이고 사는 보람이라는 말을 했다. 그는 분명히 이 결정이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만드는 일에 부합하는지도 생각해 봤을 것이다. 그의 아름답고 귀한 생각이 행동으로 이어지고 성과를 보길 기원하는 것 외에는 내가 더 이상 할 일이 없음을 느꼈다.  사진 속 벤치에 앉아 있는 그의 눈빛을 대하면서, 잘 커준 아들에 대한 감사한 마음과 앞으로 그의 힘든 행보를 걱정하는 생각이 교차했다.


Penn Law 웹사이트에 실린 현열이의 프로파일

https://www.law.upenn.edu/live/profiles/504-albert-pak/profiles/scholars.ph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