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 길가를 활보하는 아들 현열과 엄마
2003년 1월경 어느 눈오는 날, 나는 현열이와 둘이서 오전에는 앤도버, 오후에는 엑시터와의 인터뷰 일정을 위해 5시간 반을 달려서 올라갔다. 엑시터 입학처에서 인터뷰가 끝나자 캠퍼스 투어를 인도하기 위해 어느 엑시터 한국 여학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여학생의 첫 인상은 그리 밝아보이지 않았다. 마치 무슨 압박감에서 고통을 받는 듯했다. 우리는 그녀의 가이드로 학교 곳곳을 제대로 잘 볼 수 있었다. 앤도버 캠퍼스 투어때는 학교가 워낙 넓어서 한 두군데 보다 끝났는데, 엑시터는 건물들이 콰드로 모여있어서 짧은 시간에 학교를 완벽히 볼 수 있었다. 그때만 해도 엑시터에는 한국학생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현열이는 엑시터를 택해서 입학했고 캠퍼스 투어의 인연으로 그 누나와도 계속 연락을 하고 지냈다. 집으로 오는 엑시터 신문을 통해서 가끔 그 여학생 소식을 접할 수 있었는데, 그녀는 Debate Team, 학교신문 편집인, Year Book 편집인으로 중추적 활동을 했다. 나는 이 학생이 하버드대학에 갈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었고, 본인도 그 대학이 목표라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학업성적과 수능시험 성적도 특별활동만큼 잘 관리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현열이에게 물어보니까 그 누나는 본인이 원하던 하버드가 아닌 Johns Hopkins 대학에 진학했다고 한다. Johns Hopkins는 블룸버그가 자신의 입으로 오늘날의 그를 만들어 준 고마운 대학이며 그가 10억달러의 기부금을 준 대학이기도 하다. 나도 그 누나가 블룸버그와 같은 생각을 하길 바라지만, 너무나 하버드를 원했었기 때문에 인생을 실패했다고 생각했을까봐 염려됐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걸 것을 생각하고 4년간 구슬땀을 흘렸는데, 아무 메달도 받지못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08년 경, 나는 양정고등학교의 엄규백 이사장님과 엑시터를 방문해서 교장선생님을 공식적으로 만나고, 한국학생 몇 명을 소개 받았다. 그중에 한 명이 현열이의 1년 후배인 C군이었다. 그는 조기유학생으로 중학교 보딩 최고 명문인 페센덴(Fessenden School)을 졸업하고 엑시터에 들어왔다. 현열이보다 1년 후배이지만 현열이가 혼쭐이난 엑시터에서 최고로 힘든 한 물리학 크래스를 함께 수강했을 때 펄펄날았던 학생이다. 부모님 방문의 날에서 그의 아버님과 물리학교실 앞에서 만났었는데, 앤도버와 엑시터를 놓고 고민을 했었다고 했다. 그는 엑시터 오케스트라의 콘서트 매스터로 바이올린도 잘 켰으며, 소개하는 원로 선생님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밝았으며 뭔가 꽉차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학생은 당시에 프린스턴대학에 진학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 이후로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최근에 현열에게 소식을 물어보니까, 예일대학 법학대학원에 합격을 해 놓고 지금 군대에 가 있다고 한다. 예일대학 법학대학원은 프린스턴대학에서도 10여명 정도밖에 진학못하고, 일반적으로 옥스포드대학원을 유학하고 온 미전국에서 30명 만 선발하는 로즈스칼라(Rhodes Scholar)나 마샬스칼라(Marshall Scholar)들이 즐비한, 성적만 좋다고 해서 들어갈 수 없는 미국 최고 명문법대이다. 이 학생이 예일대 법대를 들어갔다면 그는 프린스턴대학에서도 학업성적이 거의 Top 이었을 것이다. 엑시터에서 탑이면 어디서도 탑이라는 등식을 증명해 준 케이스이다.
또 기억나는 학생은 현열이의 3년 후배로 한국에서 조기유학 온 L군은 키가 1미터 90센티정도 되는 남학생이다. 그는 현열이와 같은 기숙사에서 지냈기 때문에 우리 집에도 몇번 왔었다. 학교 생활을 약간 힘들어했는데도 자기 페이스를 잃지않았다. 자기만의 철학이 있고 약간 괴짜이면서도 실력이 탄탄한 학생이다. 그의 대학 항로는 앞에서 소개한 Johns Hopkins대학에 진학한 학생과 대조되었다. 그는 아예 하버드나 예일 갈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아뭏든 그는 Georgetown대학의 대표학부인 School of Foreign Services에 진학하고는 대담하게 휴학계를 내고 파리에서 1년간 생활을 했다. 이 학과는 워싱턴DC에 있는 장점을 최대한으로 살려서 타 대학의 국제관계학 또는 외교학에 해당되는 곳이다. 그는 유럽생활을 마치고 조지타운에 돌아와 1학년을 끝내고는 영국의 옥스포드대학으로 편입해 떠났다. 이 소식은 그의 친구들뿐만 아니라 나도 놀라게 했다. 그래서 나는 가끔 현열이에게 그가 정말 옥스포드에 다니느냐고 묻는다. 그럴때 마다 그렇다고 한다. 나는 얼굴에 미소를 머금으며 "자식 기특하다"하고 말을 내뱉곤 했다. 그는 유난히도 현열이를 잘 따라서 뉴욕에 현열이 아파트에서도 1달간 와있기도 하고, 유펜에 있을때 불편한 기숙사 방에서 함께 지내기도 했다, 앞으로 이 학생이 인생을 어떻게 전개해 나갈지 매우 궁금하다. 아마도 또 다시 상상을 뛰어넘는 일을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에게 이런 고정된 틀을 뛰어넘는 생각을 갖게끔 가르쳐준 엑시터에게 경의를 보낸다.
위의 세 학생들의 대학여정에서 뭔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있다. 첫번째 학생은 하버드대학에 갈려고 노력했지만 뭔가 Top 대학이 원하는 2%가 부족했었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모든 top대학이 등을 돌렸다. 두 번째 학생을 통해서 머리도 월등히 좋고 괭장히 열심히 공부한 엑시터 최우등 학생의 순탄한 명문 대학과 대학원진학을 목격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행복해 보였다. 세번째 학생은 사회적 관념의 틀을 떠나서 매우 폭넓은 행동반경을 갖고 실면서 꿈을 키웠다. 아무도 그가 옥스포드대학으로 편입할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위의 사진에서 보듯이 현열이도 아주 행복한 생활을 보내고 있다. 현열이는 유펜에서 동아시아학과 재정학을 전공하고, 금융컨설팅에서 잠시 일하다가 지금은 북부 필라델피아지역의 한 고등학교에서 대학진학을 돕고있다. 현열이가 비영리단체에서 보수도 거의 없이 불우한 환경에 있는 학생들에게 꿈을 불어주는 일을 하는 것을 보고, "야 현열이가 록펠러 아들이냐?" 하면서 괭장히 노블한 척 또는 노블한 일을 한다고 말을 내게 한 적이 있다. 나는 그때 문득 내가 가진 것이 별로 없어도 현열이에게 록펠러가 다니는 엑시터를 권해주었고 그들이 평화봉사단이나 비스타같은 곳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는 것과 같은 경험을 시도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구나 생각했다. 그러면서 내 주머니가 갑자기 두둑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현열이는 한번도 자신의 최선을 다해서 공부한 적이 없었지만 늘 성적이 좋게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는 밤을새며 공부를 해도 피곤한 줄 모를 재미있는 분야를 찾아서 공부하고 싶다고 한다. 엑시터 졸업식에서 졸업생들이 마치 대학교 졸업생들 처럼 참 어른스럽다는 것을 느꼈었는데 이 아이들이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다.
엑시터 학생들이 만든 뮤직 비데오, 여기서 사과세례를 받은아이가 현열이다
P.S. 현열이는 2014년 9월 유펜법대(Toll Public Interest Law Scholar로 거의 풀 스칼라쉽을 받음)와 프린스턴 우드로우 윌슨 행정대학원(모든 행정대학원생에게 전액 장학금과 생활비를 주고 있음)의 복합 4년 프로그램에 입학했다. 유펜에서 2년, 프린스턴에서 1년반, 다시 유펜에서 1학기를 마치고 법학과 행정학석사 2개를 받는 프로그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