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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박중련 2011. 8. 23. 18:36






지난 2011년 4월8일 직장에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하던 중, 서울의 외숙모로부터 그곳에 있는 내 여동생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내는 그 여동생의 남편이 부정맥으로 병원 응급실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병간호를 돕기위해 이미 한국에 나가 있었다.  남에게 폐끼치길 싫어하는 여동생은, 아내가 돌봐야 할 가족을 두고 먼 곳에서 온 것이 무척 미안하고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서울에 도착한 언니에게 왜 왔냐고 버럭 화를 냈지만, 나중에는 같이 병간호를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가깝게 지냈다. 여동생의 급거는 매제가 응급실에서 의식을 잃고 누워있는 상황에 일어났기 때문에 어린 조카들이나 나이 많은 엄마가 홀로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때 그곳에 있었던 아내가 큰 도움이 되었다.


여동생은 엄마와 10년 이상을 한국에서 함께 보냈다. 엄마는 외할머니가 106세로 작년에 돌아가실 때까지 그분의 병간호를 하면서 지내셨다. 그러면서 엄마와 여동생은 모녀보다는 친자매와 같이 깨알이 쏟아지는 시간을 보냈다.  지금 엄마 나이는 81세이고, 여동생은 살아 있으면 51세이다. 이제 외할머니도 돌아가셨고 여동생도 없기 때문에, 엄마는 한국에 혼자 남던지, 미국에서 우리 형제와 함께 지내는지 결정을 해야 했다.


엄마는 대학생인 조카들과 기적적으로 살아난 매제를 돌보기위해 한국에 남기 원하셨지만, 가족들은 한 두번 쓰러지시기까지 한 81세 할머니가 도움보다는 폐를 끼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노인들에게 한국에서 몸이 아프면 아무때나 근처에 있는 병원에 가서 진찰하거나 약을 타고, 무료로 지하철을 타고 서울인근 어디든지 갈 수 있다는 것이 매력적이다. 그러나 혼자 남는다는 두려움과 미국에 가면 자식들에게 짐이 된다는 생각에 선뜻 결정을 못하시는 것 같았다, 여동생의 장례를 보기위해 도착한 우리형제는 매제 가족들과 의논하면서, 아내의 제안으로 엄마를 뉴욕의 우리집에서 모시기로 결정했다. 엄마에게는 여동생과 10년 사셨고, 이제 내가 10년, 형이 10년 모시면 엄마가 100살까지 아무 문제 없다고 말씀드렸다. 그러면서 엄마가 농담같으면서도 요즘 사회현실인 뼈있는 말씀을 내게 던지셨다. "너 미국에 가면 나 요양원에 집어넣을거지?" 그때 나는 "엄마 왜 그런 생각을 해, 엄마 우리하고 살어."하면서 안심 시켜드렸다. 마음이 약해진 엄마의 모습을 보는 순간 가슴이 메어졌다. 이제 엄마에게 여동생으로부터 느꼈던 편안한 마음을 다시 찾아드리고, 사는 스타일이 다른 우리집 분위기에 잘 어울리실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 일만 남았다.  나는 여동생의 장례를 마치고 일 때문에 미리 귀국했고, 남아서 한국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오시는 엄마와 뒷바리지를 했던 아내에게는 평소에 엄두를 내지 못했던 비즈니스 크래스 항공권을 권했다.


여동생은 그가 미국에서 결혼하기전 갖고 있던 재산 관리인으로 형수를 택하고 이미 오래전에 유언장을 남겼다. 미국에서는 유언장을 안남기면 재산을 정부가 관리하다가 복잡한 과정을 거처 상속을 하기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유사시를 대비해서 유언장을 가장 믿는 사람에게 맞겨놓는다. 유언장에는 만약 본인이 엄마보다 일찍 사망하면 자기 재산의 반을 엄마에게 그리고 나머지 반은 남편에게 돌아가게 했다. 나는 그의 유언 집행자로 그가 남긴 대 여섯개의 금융과 투자구좌를 찾아서 당사자에게 나눠주는 일을 했다. 그의 서류뭉치에 엄마를 배려하면서 쓴 깨알같은 요구사항들은 여동생이 내게 "엄마를 부탁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 엄마의 미국생활도 3개월이 지났다. 작은 것에도 감사히 여기는 분이어서 별문제는 없었지만 약간의 엇박자들은 있었다. 모든 것을 아끼면서 살아왔던 엄마는 사이즈가 같은 여동생과 자신의 옷을 몽땅 이민 가방 여섯개에 갖고 왔다. 오래된 옷들이어서 아무래도 퀘퀘한 냄새가 베어있었다. 그리고 엄마는 옷은 될 수 있으면 덜 빠는 것이 옷감에도 좋고 물값도 절약 된다는 지론을 갖고 계셨다. 어느날 아내가 엄마 방에서 빨래감이 안나온다고 내게 귓속말로 전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엄마에게 빨래감을 많이 줄수록 가족들에게 더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해 드렸다. 아이들이 병마게를 따놓고 남긴 음료수는 아까와서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다가 본인이 마시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부터는 음료수는 다 마시거나 그렇지 못할 때는 병을 완전히 비우는 습관을 갖게되었다. 엄마에게는 나중에 배탈이 날 수 있으니 그러지 마시라고 말씀해 드렸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집에 도움이 되려고 집안 구석구석을 신경쓰시는데, 전에는 잔디밭에 난 민들레를 호미로 뽑으시다가 손목에 무리가 가서 물리치료를 받아야 하는 일도 생겼다. 이러한 것들은 크게 문제 될 것이 없고 조금씩 고치면서 살면 되는 것들이었다.


나는 아이들 눈에 할머니가 어떻게 비춰지는지도 궁금했다. 그래서 대학을 마치고 온 현열이와 집에 있는 막내딸에게 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부정적으로 달라진 것이 있는지 물었다. 현열이는 할머니 방에 들어가면 본인이 어렸을때 코네티컷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서 나던 냄새가 나는데 자신은 괜찮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내색을 하지않고 할머니 방에 자주 가서 함께 TV를 보기도 했다. 승연이도 혼자계신 할머니를 위로해주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사실 많은시간을 함께 보내게 될 승연이가 철없이 할머니에게 상처주는 말을 하면 상황이 힘들어 질 수 있다.  내가 보기에 그와 할머니의 커뮤니케이션에 약간의 문제는 있지만, 그의 중심에 할머니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좀 튀는 면이 할머니에게는 더 귀엽게 보이는 듯했다. 할머니는 "승연이가 나를 싫어하면 내가 여기 어떻게 있냐" 하시면서 "승연이가 내게 아주 귀엽게 잘하기 때문에 마음이 편하다"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운동이 부족할 수 있는 엄마를 모시고 동네를 구경시켜 드릴 겸 여러코스로 함께 산책을 했다. 손을 잡고 산책할 때면 엄마는 소풍을 가는 유치원 학생같이 좋아하셨다. 내가 못할 때는 현열이에게 할머니와 산책을 하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비가 억수 같이 쏟아지던 어떤 날에는 엄마 손을 잡고 현관을 시작해서 리빙룸, Dining Room, 부억으로 연결되는 25미터 정도되는 실내코스를 40번 정도 함께 돌았다. 정신없이 좁은 공간을 함께 도시고 난 엄마는 그 기억을 평생 잊지 못하겠다고 하셨다. 


어느 주말 한가한 오후에 텅빈 고등학교 파킹장 주위를 나와 함께 걸으면서 엄마는 나를 재미있게 해주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셨느지, 내가 잘 모르는 엄마 고모네 9명 사촌들과 그 자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셨다. 제일 큰 사촌오빠가 일제시대 때 성북동에서 함께 살았던 것부터 시작해서 9번째 막내동생에 이르기까지 그집 자손들 사오십명 이야기를 15번 도는 동안 거의 다 커버하셨다. 내가 제대로 듣고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지금 이야기 하는 사람이 누구의 자식인가 내게 되 물어보시고 제대로 답하니까 신이 나셔서 더 깊이있게 설명하셨다. 이렇게 같이하는 시간을 갖게 되면 아마도 엄마네 친척 대부분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산보를 마치고 집으로 함께 걸어오면서 엄마가 안계시면 그분들과 나와 더 이상 연결되지 않을 뿐더러 그들의 가족사를 들을 수도 없을거라는 생각을 하니까 엄마와 함께하는 시간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인식하게 되었다.


엄마의 건강을 위해 공들인 우리의 노력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된 적도 있었다. 하루는 밝은 날인데도 고도근시인 엄마가 구석에 있는 아령을 제대로 보지못하고 발에 걸려 넘어져서 물리치료를 받은 적이 있었다. 또 한번은 자정에 응접실불이 켜진 것을 보고, 절약정신이 발동한 엄마가 스위치를 끄고 컴컴한 상태에서 방으로 돌아가다, 구석에 있는 책가방에 걸려 넘어진 적이 있었다. 나는 그때 오랫만에 되찾은 건강을 잃어버리고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엄마를 생각하며, 푹 주저앉아 애궂은 책가방에 원망의 시선을 고정하고 만감이 교차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여러 약을 복용하시는 엄마에게 나는 신진대사를 잘 할 수 있게 얼음물을 매일 1리터정도 병에 담아서 탁자에 놓아드렸다. 가끔 둘 만이 있을 때 포옹을 해드리면 온 세상을 품은 듯 좋아하셨다. 그러면서도 엄마는 "네가 나를 자꾸 챙기면 내가 불편해질 수 있다, 혹시 내가 네 아내에게 섭섭하게 느낄 수있는 행동을 하면 바로 꾸짖어도 돼, 엄마는 괜찮어."라는 말을 잊지 않으셨다. 그리고 무슨 일을 할 때면 본인은 생각하지 말고 우리들끼리 하라고 당부하셨다.  혹시 집에 아내 친정 식구가 장기간 머물 일이 있으면 그분에게 불편하지 않게 형네 집에 잠깐 지내다 와도 된다는 말씀도 잊지않으셨다.  엄마는 내가 컴퓨터에 앉아서 일에 몰두하고 있을 때면 가끔오셔서 내 어깨에 손을 얹으시고, 가족에게 페를 끼치는 것 같다는 생각에 "중련아 미안해, 그리고 네 아내에게도 미안해" 하신다. 나는 그런 말씀하시는 엄마의 손을 어루만지며 "엄마는...."하면서 화제를 바꾸곤 했다.


아침에 체육관에 가기위해 새벽 5시에 일어나면 어느새 내 발자국 소리를 듣고 부억에 가서 생식을 타놓고 기다리신다. 잠옷차림으로 아래층에서 생식을 들고 반기시는 엄마를 보며 언젠가 그 자리에 안계실 엄마의 형상을 생각하면서 지금 이 순간의 중요성을 다시 음미해 본다. 엄마는 내가 마시고 난후에, 컵밑에 생식덩이가 조금 남아 있으면, 이것을 남기면 어떻게 하시냐고 하시면서 본인이 물에 타서 얼른 말끔히 비우신다. 어떤 때는 정말 남기지 말라는 건지 아닌지 혼란스러울 때도 있다.  내게는 그말이 아들의 아침 숨결이 베어있는 생식컵을 마실수 있게 오늘도 조금 남기라고 들릴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온몸에 안 아픈 곳이 없으셔서, 여러 약을 복용하시는데 어떤 때는 약 기운에 나를 몰라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울 해 볼 때도 있다. 요즈음은 전에 사다 드렸던 sudoku책을 찾으신다. 주위분들로부터 sudoku를 하면 치매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말을 들으셨던 것 같다. 엄마의 건강한 삶에 대한 의지를 확인한 후엔 내 마음도 약간 안정됐다. 새벽 5시 반에 집을 나서면서 엄마를 두손으로 넙적 안아드리고 나면, 엄마가 그 힘으로 오늘 하루를 버티신다는 생각에 내 마음도 가벼워진다. 


엄마와 함께 사는 것 때문에 생활의 큰 변화를 맞은 사람은 아침 일찍나가서 밤늦게 들어오는 나보다 아내이다. 그동안 아내는 엄마를 병원에 모셔가기도 하고 엄마에게 돌발상황이 발생할 수 있을까봐 외출도 자제하곤 했다. 이제 고등학교에 들어간 딸을 정신없이 뒷바라지해야 하는 아내에게 모셔야 할 분이 더 생겼다는 것이 그에게 큰 도전이다. 엄마가 감사히 여길정도로 열심히 보살피는 아내를 위해, 그의 마음을 위로해주고, 힘을 덜어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엄마와 함께 살면서 아이들에게 할머니와 엄마 아빠의관계 그리고 자신들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며 더 성숙해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은 큰 수확이다.


엄마를 볼 때면 만 81세의 엄마를 남겨두고. 내게 무언으로 "엄마를 부탁해"하며 세상을 떠난 여동생의 모습이 떠오른다.


세계 1%를 꿈꾸면 두려움 없이 떠나라.  http://www.youtube.com/watch?v=Skw6Nv8pS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