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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따라 하지마라."

박중련 2011. 4. 19. 11:30

 

 

 

 

지난 2011년 4월5일 여의도 국회의사당 의원회관에서 창조한국당 이용경의원의 출판기념회가 있었다. 이날에는 약100여 국회의원을 포함해서 600여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뮤지컬디렉터 박칼린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http://www.vop.co.kr/A00000380183.html 이용경 국회의원은 나의 외삼촌이다. 외할아버지는 오남매를 두셨는데 우리 어머니가 장녀이고 밑에 이모가 있으며 외삼촌이 세명이 있다. 큰 외삼촌은 성모병원장을 역임하셨고 한국에서 1969년에 최초로 신장이식수술을 집도하셨다, 지난번 서울성모병원에 갔을때 어느 의사가 성모병원에서 신장이식수술을 한지 14년 후에야 세브란스병원에서 신장이식 수술을 했다는 말을 전해 주었다. 그만큼 그 일은 획기적이었다. 막내 외삼촌인 이용경 국회의원도 우리나라의 정보통신의 격동기에 KTF와 KT의 사장을 지냈고, 현재는 국회에서도 소수당인 창조한국당의 국회의원이지만 매우 인상적인 의정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남따라 하지마라" 라는 말을 하신 외할머니의 말씀을 책의 타이틀로 잡았다. 나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외갓집에서 태어나서 자랐기때문에 누구보다도 그를 잘 이해한다. 이 블로그에는 내가 이미 쓴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대한 내용과 외삼촌 이용경 의원에 대한 내용 그리고 이책을 통해서 내가 알고있지 못했던 내용을 3부로 전개하려고 한다. 

 

 제 1 부  외할버지와 외할머니 (이용경 의원의 부모님)

 

지난 2000년 9월28일 외할아버님의 유고소식을 접하고 나는 어머니와 함께 몇 시간 후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편에 몸을 담았다. 그는 애국지사도 아니었고 고위공무원직을 지내신 분도 아니었으나, 경기도 안양시 근대사에서 기독신앙인과 의료인으로 남긴 자취는 자못 큰 것이었다. 만 94세로 결혼 81주년을 목전에 두고 만96세이신 외할머님을 홀로 남기시고 돌아가신 외할아버님에 대해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교훈 되는 점이 있어 그의 일생을 재조명하여 보려한다.

 

나는 학교 갈 나이인 일곱 살 때까지 외갓집에서 자라났다. 어머니의 손을 덜어주고, 손주를 키워보고 싶으셔서 자원하신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방학 때면 늘 외갓집에서 지냈었다. 그 곳에서 보고자란 일들은 후의 내 인생에 큰 도움이 되었다. 외할아버지의 존함은 이형래 이며, 그는 1906년 2월12일 경기도 파장리의 광주 이씨 집성촌의 한 양반집 4남2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3살 되던 해 아버지를 여의시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난 그에게 남겨진 유산은 아주 빈약하였다. 그러한 생활조건 때문에 근검 절약하는 습관을 몸에 익히며 자랐다. 항렬이 높아 동갑내기 조카들이 많았는데 서당 등 일상 생활에서 그들과 선의의 경쟁에서 지지 않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러한 지기 싫어하는 성격은 그를 자신의 처한 위치에서 더 큰사람으로 만드는 데 한 몫을 했다. 삼일운동이 나던 1919년 만 13살 되던 해 자신 보다 두 살 많은 경기도 남양 홍씨 가문의 홍갑숙 할머니와 결혼하였다. 만13세까지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결혼 후 아내의 조언으로 초등학교에 입학하시었고 보성고보와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하였다. 할머니는 학교를 다닌 적이 없는데도 독학으로 언문을 깨우치시고, 성경을 비롯한 여러 고전을 섭렵한 박식하신 분이었다.

 

1947년 외할아버지는 경기도 안양시 일 번지 안에 있는 전통기와집으로 이사와 삼성병원을 개원하셨다. 그 건물은 안양읍사무소가 바로 옆에 새 건물을 지워 이사가기 전까지 사용하던 곳이었고, 할아버지가 이사오셔서는 가정집 외에 병원과 교회로도 쓰였다. 1992년까지 45년간을 사시다가 아파트로 이사가시면서 그 곳을 떠났는데, 안양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기와집이고 읍사무소였던 역사적 가치 때문에 안양문화원에서 구입하여 사적으로 영구보전 하고있다. 그 곳은 나를 비롯한 손주 5명이 태어난 곳이기도 했다. 1950-60년대에는 안양에 병원이 두 세 개정도 밖에 없었고, 안양거리는 구시대 촬영 셋 정도로 작았었다. 안양유원지나 인근공장에서 사고가 나면 여러 기관의 촉탁의를 맡고 계셨던 할아버지의 병원으로 환자들이 실려왔다. 그 당시 안양에서 출산한 아이들의 30-40%는 할아버지가 손수 받으셨다. 병원에는 동네 유지들이 바둑을 두러오시곤 했다. 할아버지의 바둑은 영원한 7급이었으나, 배움에 대한 의지가 강해, 늘 신문에서 고수들의 복기를 연구하시는 분이었다.

 

1954년 할아버지 안방에서 시작한 안양제일교회는 점점 교인수가 늘어, 옆의 병원건물이층으로 옮겨서 예배를 보았다. 그 후 할아버지가 기증하신 현 위치의 텃밭에 새 성전을 지어 이사와 현재 교인 4천명이 모이는 하나님이 크게 쓰시는 교회로 성장했다. 나는 어렸을 때 주일마다 성가대대원들의 식사를 준비하시고, 귀한 선물이 들어오면 목회자 몫으로 챙기시는 모습을 보며 자랐다. 할아버지가 병상에 누우시기 2년 전까지 만해도 새벽4시에 하는 새벽기도를 거의 한번도 거르신 적이 없으셨다, 할머니가 거동을 하셨던 몇 년 전까지 만해도 노틀담의 곱추같이 완전히 90도로 꾸부러지신 할머니를 한 손에 잡으시고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다정히 걸으시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어렸을 때 모기장이 쳐있는 안방에서 두 분과 함께 잘 때면 간간한 귀뚜라미 소리와 함께 두 분의 정다운 대화가 들리곤 했다.

 

할아버지가 의사였기 때문에 풍족한 생활을 했었을 것으로 사람들이 생각할지 모르나, 두 분의 생활은 매우 검소하였다. 장례식에서 어느 장로님이 기도 중 “10원 한 장 쓰시는 데 벌벌 떠셨지만, 교회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바치신...” 이라고 말씀하신 그 대로의 삶을 사셨다. 요즘은 환경문제 때문에 리사이클을 중요시하는 시대가 됐지만, 두 분은 일찍이 생활 속에서 리사이클을 실천하셨다. 내가 그분들과 함께 한 지난 40여년 동안 한번도 가구를 사신 적이 없으셨고, 음료수는 언제나 끓인 수돗물 또는 산에서 몸소 가져온 약수물을 사용하셨다. 화장실에 놓여있는 비누는 늘 은박지가 한 면을 감싸고 있으며, 옆에 있는 변기 물통에는 빨간 벽돌 하나가 들어가 있고, 화장지는 얇은 일일달력을 1/4로 짤라 대신하였다. 할아버지 댁에는 골동품보다는 다음 사용을 기다리고 있는 고물들이 즐비하였다. 그렇게 절약하는 생활을 하시는 분이었지만, 교회에다가 건축헌금, 장학금, 교회대지, 교회묘지등 재산은 제일 먼저 아낌없이 내놓으시는 분이었다. 안양이 70년대에 개발붐을 타고 땅을 가진 사람들이 부를 누렸지만 살고있는 집과 병원 외에는 가진 부동산이 없으셨다. 땀흘려서 일한 노력의 대가 외에는 어느 것도 바라지 않으시는 분이었다. 떡이나 반찬거리를 머리에 지고 팔러 다니시는 분들이 오시면 절대 값을 깍지 않고 사주시곤 했다. 일사후퇴 때 대전에 피난 가서 떡장사를 하면서 행상의 고달픔을 느끼셨다고 한다. 손자들이 모처럼 오면, 시장에 가서 닭을 잡아오시지만, 평소 할아버지 밥상엔 고기구경 하기가 힘들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자녀들을 훌륭히 키우신 분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점은 할아버지와 함께 산 나도 의문 나게 하는 점이다. 큰외삼촌은 1969년에 한국에서 처음으로 신장이식수술을 하셨고 성모병원장을 지낸 이용각박사이고 작은외삼촌은 우리나라 정보통신분야의 리더중 한 사람으로 현재 한국통신 사장인 이용경박사이다. 구시대 사람들인 두 분이 자녀들에게 과학적 육아 방법을 적용했을 리 만무이다. 내가 보기엔 두 분의 생활자체가 교육의 현장이었다. 흐트러지지 않는 생활을 하시는 두 분의 말씀에는 늘 힘이 실려있었고 자손들은 존경하는 마음으로 따랐다. 존경하는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자식들의 노력이 좋은 결과를 낳지 않았나 생각된다. 어린 나에게도 공부하라는 말씀보다는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하셨던 기억이 난다.

 

워낙 대쪽같은 성격을 갖고 계셔서, 직설적인 발언 때문에 목사님이나 다른 장로님들이 마음 고생하셨던 것이 지금 생각하면 좀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 그러나, 그 마음의 중심엔 하나님을 경외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열정이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지나친 검소한 생활태도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기도 했으나, 쓰지 않고 모은 재산을 하나님사업에 바치는, 쓸 때 쓸 줄을 아시는 분이었다. 그리고 그는 한 여인과 81년을 살고, 한 교회를 46년간 목숨이 다할 때까지 섬긴, 주어진 것을 소중히 생각하며 그 안에서 행복을 찾을 줄 아시는 분이었다. 일세기를 사시는 동안 우리의 믿음생활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하였고 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변화를 쫓아갔으나, 그러지 않고도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며 살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증인이 되셨다.

 

2000년 10월 경에 씀

 

제 2부  KT 사장 이용경 

 

외삼촌인 KT의 이용경 사장은 만 16살에 대학에 입학하면서 최연소란 소리를 들었고, 지금은 정보통신업계에서 60세의 최고령으로 한국재계 6번째 규모의 기업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삼사십대 사장들이 맹활약하는 이 업계에서 계속 신상품을 내놓으면서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이용경 사장의 살아온 배경을 지켜볼 수 있었던 조카인 나는 그의 인생역정을 한 번 회고해 보고자 한다.  

 

그는 1943년 6월12일 생으로 나와는 14살 차이이다. 나는 초등학교 가기 전까지 안양에 있는 외갓집에서 자랐고 방학이면 대부분의 시간을 그 곳에서 보냈다. 안양에 가면 가끔 안방다락에 올라가 옛날 사진첩과 골동품 등을 보곤 하였다. 좁고 캄캄한 공간에서 쪽 창문으로 들어오는 가느다란 햇살에 의지하며 외갓집의 역사를 확인하는 일은 어린 나에게도 흥미로 왔다. 그 중 하나가 외삼촌이 미국유학 갈 때 자신의 소지품을 모아둔 벽지로 도배한 궤짝이었다. 그 궤짝은 타임머신과 같이 외삼촌이 주로 대학 다닐 때 쓰던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검은 뿔테의 안경을 끼고 함박웃음을 하면서 친구들과 찍은 사진, 잡지, 노트, 그리고 작가 전혜린이 쓴 책 등을 보며 미국에서 유학하고 있는 외삼촌이 어떤 사람인가 그려보곤 했다.

  

외삼촌은 외할아버지가 만37세 그리고 외할머니가 만39세 때 나으신 늦동이로 3남2녀 중 막내이다. 그는 초등학교를 일년 일찍 입학했고 삼학년때 일년 월반을 해서 동급생보다 나이가 두 살 적다. 안양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경기중고등학교를 나와 만 16살 때 서울대학 전자공학과에 들어갔다. 그가 전자공학을 전공으로 택한 것은 앞으로 전자로 빵을 구워먹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 마이크로 웨이브로 빵을 구울 수 있는 것을 볼 때 그 말은 적중 된 셈이다. 외할아버지께서는 중 고등학교, 대학교 입학시험, 그리고 유학 시험까지 당신의 마음 고생 한번 시키지 않고 매번 합격하였던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하셨다. 후에 외삼촌은 한국정보통신업계의 리더 중의 한사람으로서 외할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였다.

 

나는 미국에 유학 가 있는 외삼촌이 보내오는 편지를 외조부모님과 함께 보며 미지의 세계인 그 곳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면서 자랐다. 학교 문턱에도 못 가신 외할머니가 훈민정음에 가까운 필체로 쓰시는 편지 귀퉁이에 나도 MIT공대에 유학을 가서 훌륭한 과학자가 되겠다는 포부를 적기도 했다. 지금도 외삼촌은 나를 보면 MIT이야기를 하곤 한다. 명문대에서 유학하는 외삼촌을 보며 꿈을 키웠기에, 나도 MIT에 버금가는 유펜 와튼스물을 졸업할 수 있었으며 아들 현열이도 필립스 엑시터와 유펜 와튼스쿨에 다녔다고 생각한다.  외삼촌은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에서 광통신으로 박사학위 코스를 밟았다. 광통신이 지금에서야 우리사회에서 실용화되고 있는 것을 볼 때 35년 전인 그때는 아마 이론이나 실험단계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외조부모님이 1970년에 미국을 방문했을 때 중간기착지인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에서 두 분을 뵈러 온 외삼촌이 안경을 벗으면서 눈물을 머금는 사진을 본적이 있다. 이때 흘린 그의 눈물은 두 분을 뵙는 반가움도 있었겠지만 그의 박사학위 연구과정이 힘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외조부모님은 그가 대학에서 만들었던 바깥커버와 주파수 눈금이 없는 라디오를 사용하셨다. 에디슨 시대에 사용됐음직할 진공관이 보이는 그 라디오를 내가 미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안양을 방문할 때도 듣고 계셨다. 아들이 만들었기 때문에 귀한 면도 있지만, 여기서 우리는 옛 것을 소중히 여기며 알뜰하게 절약하는 가정환경을 엿볼 수 있다. 외할머니는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관대하셨으나 체면치례에는 선을 그으셨다. 우리에게 늘 “남의 욕 삼일 안간다” 라며 분수이상 넘치는 행동을 자제하도록 하였다. 그가 KT에서 경비절약운동을 벌이는 것도 이러한 배경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책벌레는 아니었고 모든 것을 여유 있게 즐기는 스타일이다. 옷은 연구원보다는 비즈니스맨에 가깝게 늘 말끔하게 입고 다니는 편이다. 유학시절에는 오토바이를 타고 다녀서 주위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헸다. 그는 연구생활의 대부분을 뉴저지 우리 집 가까이 있는 홈델 (Holmdel)에 소재한 벨 연구소에서 보냈다. 미국의 연구소에는 우리나라 수재들이 수 천 여명 일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들에 대해서 잘 모른다. 록키산맥 한가운데서 한줌의 거름이 되기 위해 쓰러지는 아름드리 고목과 같이 그들은 사회를 변화시켜나가는 숨은 인재들이다. 오늘날 한국이 전자, 정보통신에서 이렇게 우뚝 설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의사인 아버지를 따라 의학을 공부했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있었다. 당시 그의 큰 형님은 한국의학계에서 인정 받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의사가 사회에서 존경받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움을 누리는데 반해 연구원의 삶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며 경제적으로도 넉넉하지 못하다. 우리나라의 이과지망생의 대부분이 의대나 한의대에 진학하려는 것은 산업의 균형적 발전을 꽤해야 하는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는 불행한 일이다. 유펜의 1만명 학부학생 중에 물리학 전공인 학생이 10명 미만인 것을 볼 때 이것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만약 그가 의대에 갔었다면 훌륭한 의사는 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의 그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1991년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한국통신의 연구소 창설멤버로 입사했다. 이 결정은 그의 앞날을 통째로 바꿔놓았다. 그가 23년간 미국에서 얻은 지식과 몸담았던 연구기관의 좋은 환경과 여러 시행착오를 미리 경험한 것은 그가 KT에서 일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얼마 안되어 선로연구소장직을 맡았고 그 후 약10년간 천 여명 연구인력과 수천 억의 예산을 집행하는 연구개발본부장의 일을 하였다. 연구개발본부는 한국통신의 이익센터 중 하나였기 때문에 그의 위치는 실제로 단독회사를 경영하는 최고 경영자와 다름없었다. 그 동안 한국통신사장이 여러 번 바뀌었지만 그가 한 직책을 오래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지도력과 대인관계가 좋았기 때문이다.

  

그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모르지만 한때 군장성출신의 사장이 들어와서 무슨 이유에서 였던지 모든 조직을 위아래로 바꾸어 놓은 적이 있었다. 연구개발본부장을 하던 그가 어느 날 연구개발본부내의 무선통신연구소 소장이 되었고 그의 산하 연구소장이었던 분이 그의 상사가 되었다. 나는 그 후 얼마 안되어 외삼촌을 뉴욕에서 만났다. 그에게서 명함을 건네 받은 나는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몰랐다. 나는 외삼촌의 표정을 보면서 그가 현실을 잘 받아들이고 이 시련을 계기로 더 도약할 수 있기를 마음속 깊이 바랬다. 돌이켜보건 데 그가 만약 사표를 쓰고 나왔다면 지금의 그 또한 없었을 것이다. 그가 무선통신연구소장을 한 것은 KTF이동통신사장으로 가는 데 아마 프러스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KTF의 경험이 KT 사장이 되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그는 부드러운 성격을 가졌으며 남보다 한 박자 앞서는 위트가 있다. 나는 그가 화를 내는 것을 본적이 없다. 세간에는 그가 두 번은 부드럽게 참으나 세 번째 실수를 할 때는 메시지를 보낸다고 한다. 하여간 그는 힘든 상황 일 수 록 더욱 침착해진다. 그리고 그는 사나이다운 배짱과 상대방을 혼란스럽게 하는 포커페이스도 갖고 있다. 그의 바둑실력은 1급 정도 되는데 바둑을 둘 때면 물고늘어지는 끈질긴 승부근성을 보이기도 한다. 그는 복잡한 케이스를 단순화해서 의사 결정하는 능력도 지녔다.

 

최고경영자는 주주들에게 최대의 이익을 주는 기업, 기업 구성원들의 노력에 최대의 보상을 꽤하는 기업, 사회에 공익을 끼치는 기업이 되도록 힘써야 한다.  “노력한 만큼 거둔다”는 그의 좌우명에서 보듯이 그는 KT를 세계 초일류기업이 되게 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KT는 우리나라 정보통신 산업의 주축기업이다. 그의 잘못된 결정이 우리나라 정보통신 산업을 후퇴시킬 수도 있으며 현명한 결정이 나라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는 어느 덧 자신보다 훨씬 큰 사람이 되어 있었다.

 

2004년에 씀

 

 

제3부 국회의원 이용경

 

나는 "남따라 하지마라"라는 말을 책의 제목으로 정했다는 데 좀 의아했다. 그래서 알고보니까 외할머니가 104세때 국회의원되어서 뵈러가니까 국회의원들이 신조대로 행동을 하지 않고 당의 표찍는 기계역활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욕을 얻어먹는것을 보아서 그러신것 같다. 외할머니는 늘 우리에게 분수를 지키고 자기 신조대로 살라고 하셨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외갓집 식구들은 가족관계에서도 통큰 기부하는데는 약간 인색한 편이다. 반면에 친가집 식구들은 능력이 안되도 막 쏘는 편이며 남의 집안일을 자기일 같이 돕거나 참견하는 편인데 서로가 일장일단이 있다. 종함적으로 보면 전자가 후자보다 더 나은 것같다. 남따라 하지않는 그의 외로운 반대 한표가 두번에 걸쳐 언론에 대서 특필된 적이 있다. 하나는 국회예산안 통과하는데 한나라당 의원들이 모두 찬성하고 야당의원들이 물리적으로 투표를 막으려고 했을때 그는 투표에 참여해서 귀중한 반대표를 행사했다.(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view.html?cateid=1020&newsid=20101209091216543&p=ned)

 

다른 하나는 국회의원 종신연금법안에 진보신당의 조승수 의원과 함께 반대를 했다.(http://www.shinmoongo.net/sub_read.html?uid=19680§ion=sc1) 그는 현재 국회의원 2명뿐이 창조한국당 소속의 일원이지만 아주 멋있고 의욕있게 국회의원직을 수행하고 있다. 그가 반대해도 통과될 법안에 왜 굳이 반대했을까 생각을 해보았는데, 그 한표가 한국 국회에 신선한 충격을 줄 것을 알기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마케팅 커뮤니케이션의 귀재이다.

 

그가 KT 사장이었을때 모든 직원들에게 붕어빵을 구내식당에서 먹게 한 적이 있었다. 붕어빵의 식으면 맛없는 속성을  KT의 통신상품전달 타이밍과 비유해서 직원들에게 인식시키기위해서다. 그는 늘 기발한 아이디어를 제시했고 그것을 과감히 실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국회의원인 그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집안 일을 처리할 때도 탄성이 절로난다. 10년전에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때 들어온 부조금에 자신의 것을 더해 1억원을 외할아버지가 졸업하신 세브란스에 기부하셨고, 지난해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때는 8천만원을 한동대에 외할머니의 이름으로 장학기금을 만들었다. 경조금은 기쁘거나 어려울때 서로 돕는 아름다운 행동이지만 어떻게 보면 사회적 폐단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것을 아름다운 목적을 위해서 사용한 그의 기지에 놀랐다. 

 

그의 책에서 몇 가지 자녀교육과 최고경영자로서의 경험담을 발췌해 봤다.

 

 

이용경 전 KT 사장의 "남따라 하지마라" 자서전에서 발췌한 글

 

 

"해피 고 럭키, 자식 교육이 준 교훈

..... 두 아들을 키우면서 이제 와 생각해 보면, 큰 아이한테 미안한 마음이 더 많이 든다. 내가 너무 엄하게 대하고 공부하라는 소리만 많이 했지, 진정으로 아이가 원하는게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큰 아이가 자랄 때 학업성적은 일등이었지만 자신에 대한 불만이 많았던 것 같다. 대학에 가서도 전공에 만족을 못하고 여러번 옮겨 다니더니, 교사를 하다가 나중에는 동양 의학을 공부했다. 머리가 좋은 아이니까 전문가로 입신을 했으면 하는 기대가 있었지만, 그보다도 무슨 일을 하면서 살든 행복하면 그게 제일인데 그러지를 못했다.

   큰 아들은 미국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도 강해서 소수민족 권익보호 사회단체에세도 활동하고 했는데, 그런 저런 과정를 부모인 우리와 이야기도 하면 좋으련만 그렇지를 않아서 참 안타까왔다. 지금은 풍산 류씨 집안의 아내를 맞아 LA에서 두 아이를 키우며 한의사로서 명성을 쌓아 가고 있는 것이 감사하다. ,,,,,큰아이 키우는 과정이 일종의 타산지석이 되어서, 작은 아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가만 놓아두고 되도록이면 스트레스를 주지 않으려고 했다.

   어쨌든 그렇게 느슨하게, 관용적인 테도로 키운 작은 아들은 청소년기에 공부는 그냥 중상 정도로 하고, 교회를 열심히 다녔다. 친구들이랑 어울려서 밴드도 하고,즐기면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작은아이는 오히려 별로 힘들여 공부한 것 같지도 않은데, 대학 가서 영어랑 비즈니스를 전공하더니, 어느 날 의대를 가겠다고 했다. 의사 집안에서 자란 나로서는 누군가 의업을 이어가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어도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었는데, 가만 놓아두었더니 자기 페이스대로 공부해서 지금은 안과 전문의가 되어있다. 작은아이를 보면서 나는 '아, 저렇게 자기식대로 직업을 가지면서 사는 것도 괜찮은 인생이구나,"하는 걸 느낀다. 우리는 너무 부모의 대리만족을 위해서 아둥바둥 아이들 교육에 목숨을 거는 식으로 사는데, '그럴 필요가 없구나', '그저 진실하게 기르는 것이 제일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영어의 '해피-고-럭키Happy-Go-Lucky'라는 말이 정말 일리가 있는 것 같다....'행복해져라, 그러면 행운이 따르게 된다.;는 뜻인데 무엇을 하든지 행복한 마음으로 즐겁게 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 이른바 '긍정의 힘'을 역설하는 말이다. (pp,131-133)


   (블로거 주:  나의 외사촌인 큰 아들 석재는 필라델피아근교에 있는 명문 스와스모아 대학을 졸업하고, 필라델피아 우범지역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수학선생을 지냈다. 그곳에 있는 민족학교에서 사물놀이패에 핵심멤버로뛰고 그곳에서 소수민족권리와 사회정의에 많은 관심을 갖게되었다. 유창한 고급영어를 구사하는 그는 동포와 소수민족의 권리향상을 위해서 워싱턴에 가서 상원의원과 하원의원들을 만나면서 훌륭한 일들을 많이 했다. 석재는 워낙 머리가 좋기 때문에 분명히 한의사로서 성공할거라고 믿는데, 벌써 그의 불임치료의 성공율이 50%에 이른다고 들었다. 내가 당뇨때문에 살이 빠졌다고 하니까, 형 나한테 애기했으면 내가 한약을 보내줄텐데 하면서 자신있게 말하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의 동생 완재는 노스웨스턴대학학부를 졸업하고, 그 대학 의대에 진학했으며 후에 Mayo Clinic에서 안과 Fellowship과정을 마쳤다.)


   "나는 엔지니어 출신 사장으로서 마케팅에는 비전문가였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과감한 전략을 택해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독도 광고"였다. ....독도 서비스를 하겠다고 했더니 처음에는 외무부 등 정부 부처가 다들 반대했다. 우리는 외교마찰에 대한 우려 때문에 주저하는 정부를 설득하기 위해, 독도가 아닌 울릉도 해발 5백 미터 고지에 기지국을 설치하고 독도 서비스를 실시했다. 독도의 특수 환경으로 인한 여러 기술적 난관을 돌파하는 노력 끝에 드디어 2002년 5월 24일 기다리던 독도 개통이 이루어 졌다. 그래서 연간 10만 명에 이르는 독도 인근 관광객이 KTF 휴대폰을 쓸 수 있게 됨은 물론이고, 포항-을릉도 항로의 품질까지 향상시키는 시너지 효과를 거두었다. 더구나 당시는 한일 월드컵으로 세계의 이목이 우리나라에 집중된 시기였다. 전 세계에 독도가 우리 땅임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우리는 이런 광고를 내보냈다.  "한국 이동통신이 터지는 곳은 한국 땅이고, 일본 이동통신이 터지는 곳은 일본 땅입니다. 한국 이동통신이 터지는 독도는 대한민국 땅입니다." (p.164)


   "나는 KT본사 사장 취임식장으로 가는 길에 마음을 가다듬으며 생각했다. 4만5천명의 대식구들 앞에 서서 어떤 말부터 시작해야 할까?..나는 네 가지 경영방침을 이야기 했다. - 첫쨰, 튼튼한 민영화 기반을 완성해야 한다. 공기업의 때를 완전히 벗기기 위해 곳곳에 남아있늠 불합리한 관행과 비능률을 제거하고 프로세스를 전면적으로 개선해 나갈 것을 강조했다. - 둘쩨는 고객만족 경영을 해야 한다.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열쇠는 감동"이라는 손정의 회장의 말은 치열한 경쟁 상황에서 더욱 의미있는 말이다. 서비스를 파는 것이 아니라 브랜드를 판다는 생각으로 일해야 한다.- 셋째, 가치 경영이 중요하다. 외형적인 성장보다는 실질적 수익 창출이 중요한 것이다.- 넷째, 현장 중심 경영을 해야 한다. 현장의 정보가 즉시 본사의 전략부서에 전달되고 이를 기반으로 한 본사의 시장 전략이 신속하게 현장에 전해져야 한다.  나는 무엇보다도 투명하고 합리적인 경영을 하고 싶었다.(p170)  (KT는 2003년 지배구조가 투명한 최우수기업으로 선정되었다.)


   "성공하면 행복한 게 아니라 행복하면 성공한다.. <예수 CEO>책에 "스태프 훈련에 모든 것을 걸어라"라는 말이 있다. 사람을 키우는 데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는 말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진리이다. 공자님이나 예수님이나 다들 제자를 데리고 살면서 몸소 실천으로 모든 것을 가르쳤다. 제자들의 부족한 점을 다 극복하고 최대한의 역량을 발휘하도록 북돋아 주었다. 기업은 교회나 학교와는 그 목적이 다르지만, 리더의 역할은 상당 부분 같은 것이라 본다. 솔선수범해서 자신의 목표, 비전을 전파하려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남다르게 실천한 원칙이 몇가지 있다.

 

   첫째, 우선 난 나하고 통하는 사람, 생각이 같은 사람은 되도록 멀리 배치한다는 원칙을 연구개발본부 시절부터 세우고 사장이 되어서도 이를 지켰다. 엄청나게 큰 조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내 주위에 제일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가까이 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것이다....물론 측근들하고 일하는 게 나도 일하기가 편하다. 마음에 드는 사람을 챙겨주고 싶은 건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런식으로 일하면 소그룹리더 밖에는 될 수가 없다. 조직에서 자기 사람만 챙긴다는 불만을 듣게 되면, 그 조직 전체를 이끌고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가 없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를 운영하는 데도 항상 이너 서클 위주로 운영하는게 제일 문제가 되지 않는가? 좋은 리더가 되려면 측근을 멀리한다는 지적을 즐겨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둘째, 여성 인력을 양성하는 데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이동통신 최초로 여성 전용 브랜드를 개발해 성공적으로 출시한 바도 있지만, KT에 와선 연공서열을 깨고 젊고 능력있는 여성 관리자를 양성하고 발탁하기 위해 노력했다. 연공서열이 낮더라도 능력 점수를 높게주어서 인력개발의 동맥경화증을 치유하고 싶었다. 물론 이런 시도는 기존 시스템에서 승진 기회를 기다려 온 기득권 층으로부터 강렬한 저항을 받았다. 이제까지 선임자들에게 능력 점수를 양보하며 기다려 온 자기들은 뭐가 되느냐는 것이었다. 변화는 항상 가치의 재배치를 동반하고 이 과정에서 손해보는 사람과 이익을 보는 사람이 나오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러한 저항을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연공서열 위주에서 능력 위주의 인사 시스템으로 변화가 이루어 질 수 있었다.

 

   능력보상주의라는 게 치열한 경쟁을 유도하게 되니까 어찌 보면 참 비인간적인 시스템같아 보이지만, 성과와 보상이 균형을 잘 잡아서 공정하게 운영하기만 한다면 이만큼 합리적인 제도가 아직은 없는것 같다. 사람은 항상 자기가 평소 생각했던 한계 이상의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자기 자신이 갖고 있는지조차 모르던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경쟁의 스트레스 속에서 자기 능력을 발견하고 개발하며 발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스트레스 강도가 너무 높아 아예 능력이 궤멸되는 상황은 피해야 한다.  나는 언제나 KT가 세계 최고 수준인 회사가 되길 요구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임원들이 도덕적으로나 능력 면에서 최고 수준에 이르러야 했다. 초급 임원인 상무와 상무대우로 승진하면 1년간 매주 토요일마다 외부 전문가와 명사들로 구성된 강사진으로투터 강의를 듣고 토론하게 하였다. 또한 임원의 자질은 부인에 의해서도 크게 좌우 되므로 부인들은 벌도의 교육과정을 구성하여 진행하였다. 언제나 최고의 시설, 환경, 지원 하에 교육을 진행함으로써 자부심을 가지고 일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취임사에서 강조한 것 처럼 직원들과 항상 열린 대화 채널을 가리려고 노력했다. 전국을 돌며 현장 분위기를 파악하고 직원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면서, 어떻게 하면 직원들의 사기를 올려줄 수 있을까, 효과적인 인센티브 전략은 무엇일까를 고민했다. 직원들의 주된 관심사는 언제나 승진과 봉급이었다. 하지만 그 효과는 늘 단기적이었다. 승진하면 당장 기분은 좋지만 그 약발은 대개 6개월이면 다 떨어지고 만다.  봉급도 마찬가지이다. 누군가 연구를 했다고 한다. "당신의 봉급이 얼마라면 만족하겠는가?" 이렇게 물었더니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지금 받는 것보다 20퍼센트 정도만 더 벌면 좋겠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보수와 승진으로 사기를 올린다는 얘기는 어느 정도는 맞지만 어떻게 보면 틀린 말이다. 그보다는 사람은 희망을 먹고사는 존재라서 오늘이 어제보다 낫고 내일이 오늘보다 낫다는 희망을 주는 게 중요하다. 이른바 "단계적 인센티브"전략이라는 게 그래서 필요한 법이다. 

 

   내가 직원들과 대화를 나눠보고 느낀 또 하나의 결론은 사람은 "인정' 받는 걸로 먹고 사는 동물이라는 것이다. 누눈가로부터 인정받는다는 것, 내가 한 일이 의미가 있고 내가 회사와 이 사회에 기여를 하고 있다는 자부심이야말로 사기를 올리고 조직을 활성화시키는 힘이된다.  우리는 흔히 성공하면 행복해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경험으로는 행복한 사람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것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가족, 친구, 여러가지 다른 요소도 있지만, 직업면에서 내일에 대한 자부심, 내가 일하는 기업에 대한 자부심이야 말로 분명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일하고 싶은 기업, 즐거운 기업,사회전체로부터 사랑받고 존경받는 기업을 만드는 일이 그래서 중요하다."(pp 198-200)

 

 

이 책엔 어려서 외가에서 자란 나와 외조부모님에 관한 에피소드들도 몇번 나온다. 우리는 그만큼 외삼촌과 조카관계를 넘어서 가깝다. 위의 사진이 주는 이미지와 반백의 머리에 수염을 기르고, 글쓰기를 좋아하고, 뮤직비데오를 만들고, 연극에 출현하는 나와 통하는데가 있다, 나는 외삼촌이 국회의원이 되었을때 기쁘면서도 아쉬웠다. 그러한 부담스러운 직위는 순수한 인간관계에 걸림돌이 될 수있기 때문이다. 자서전 출판을 축하하면서 내가 아는 외삼촌에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세계 1%를 꿈꾸면 두려움없이 떠나라  http://www.youtube.com/watch?v=Skw6Nv8pSlY

우리가족 이야기  http://www.youtube.com/watch?v=KxXF-zT41V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