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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기러기

박중련 2010. 8. 23. 16:42


유펜에서는 대학 3학년 때 전체 대학생의 1/4인 600명 정도가 해외 교환학생으로 떠난다. 현열이도 자신의 전공인 동아시아학과 재정학을 공부할 수 있는 대학을 찾았다. 그는 유펜 와튼스쿨과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갖고 있는 아시아 3개 대학들 중에 하나인 고려대학 경영대학에서 1학기 공부하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엑시터를 졸업하고 유펜에 진학하기 전 여름방학 동안에는 연세대학 한국어 프로그램에 다녔었고, 그 이듬해 여름방학에는 프린스턴대학이 주관하는 북경사범대학 집중 중국어 프로그램에서 대학 2-3학년 중국어과정을 마쳤다.


고대에 있는 동안에 교우들과 친분을 나눴고, 나의 주선으로 평생 잊지 못할 멘토들을 만나는 기회도 가졌다. 유펜에 돌아와서는 고대 홍보대사를 하면서 와튼스쿨 학부학생들에게 고대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소개했다. 이제 그의 페이스 북 학력 난에는 고려대학 2009학번이란 라인이 올라가 있다. 대학 3학년을 마치고는 서울에 있는 미국계 컨설팅 회사인 올리버 와이맨Oliver Wyman에서 2달간의 인턴생활을 했다. 그는 유펜 재학 중, 매 여름방학과 교환학생기간 1학기를 모두 극동아시아에서 보내며 대학가기 전 18년간 접촉이 없었던 한국과 동아시아의 중추국가인 중국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는데 매진했다.


고려대학에서의 기숙사생활


현열이는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집에서 한국어를 사용해왔고 고려대학이 전체 강의의 60%를 영어로 하기때문에 공부하며 생활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한국미술사와 한국역사를 포함해서 동아시아 학과 재정학 코스를 잘 섞어 6과목을 택했다. 엑시터의 하크네스 테이블에서 익힌 학습태도도 강의시간에 그대로 적용했다. 항상 예습위주로 공부하기 때문에 수준 높은 질문과 대화로 강의시간에 참여했으며, 고대에서도 유펜에서와 같은 강도로 학업에 임했다. 어디에 있던지 가만히 있지 않는 그는 고대 경영신문에 기고도 하고 고대 경영대학 영문 안내책자에 인터뷰도 하면서 자신의 발자취를 남겼다.


숙소는 대학 정문 바로 앞에 있는 외국학생 전용 기숙사로 정했다. 그래서 주 7일 하루 24시간동안 대학생활을 100% 만끽했다. 고대 특유의 삼겹살과 막걸리 문화를 경험해 보았으며, 몇 번의 소개팅도 했다. 당구장에서 자장면을 시켜서 먹고, 고구마 장수 장갑을 끼고 치는 4구 당구의 매력에도 푹 빠졌다. 그는 일반 한국학생들처럼 한글 텍스트를 자유자재로 하고 지하철과 국철을 타고 전국 어디든지 갈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을 떠나 올 즈음에는 일취월장한 그의 한국어 실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으며 한국역사와 문화를 더 배웠으면 하는 아쉬움을 느꼈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는 그곳에 무언가 두고 간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고 한다. 그는 이제 아빠를 거치지 않아도 한국과의 라인을 독립적으로 갖게 되었다.


아빠를 통한 멘토들과의 만남

아들이 고려대학에서 공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을 때 나는 그의 한국생활을 평생 기억에 남는 경험으로 간직할 수 있는 이벤트를 꾸몄다. 나는 그가 한국으로 떠날 때 와튼 모자 10개를 사서 그의 짐 속에 꾸려 넣었다. 그 모자는 현열이가 멘토들과 만날 때 드릴 조그마한 선물이다. 나는 그에게 현열이가 만났으면 하는 분들의 리스트를 적어보았다. 내가 알고 지내는 분들은 이메일로 쉽게 연락이 닷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은 여러 경로를 통해서 연락을 해야 했다. 모자 외에 나는 그분들의 사진을 인터넷에서 다운받아 스케치한 그림을 하나 더 챙겼다. 연필로 스케치를 해 나가면서 나는 이 분들이 그에게 어떤 조언을 해 줄까 생각하며 그림에 나의 감사한 마음을 담았다. 모두 일곱 명의 초상화를 그렸고 그분들에 대한 글과 그림을 현열이가 만나는 주마다 내 블로그에 올렸다.


이 프로젝트는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기엔 황당한 것이었다. 나로서도 현열이가 지도자들을 만나 지적인 교제를 할 준비가 되었기에 시도했다. 처음에는 현열이도 어른들을 매주 만나는 것이 부담이 되었다. 그러나 아빠의 마음을 헤아리고는 그분들이 줄 수 있는 삶의 지혜를 느껴보려고 노력했다.


현열이가 만난 분들은 모두 그에게 호감을 갖고 기대 이상의 대접을 해 주었다. 정덕구 니어재단 이사장께서는 현열이에게 니어재단에서 하는 학술대회 차 오시는 세계 저명인사의 수행과 콘퍼런스의 일정들을 맡겼다. 세아상역의 김웅기 회장은 그를 인도네시아에서 공장 부지를 구매하는데 동행케 했다. 그분은 현열이를 만나고 나서 “맑고 순수합니다.”라는 평을 해 주었다. 위의 두 분은 그를 가족같이 대해 주었다.


현열이의 리스트에는 와튼에서 내가 만난 지인 셋이 포함되었다. 그분들은 이제 현열이의 대학 선배이기도 하다. 당시 재정학 박사과정에 있었던 장하성 고려대학 경영대학장은 현열이를 만나 본 후 “잘 키우셨습니다.”라는 말을 해주었다. 와튼학부 1년 후배인 김진겸 SC제일은행 부행장과의 만남은 구면이어서 편안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 김 부행장은 그에게 Trading Floor를 보여주며 격려해 주었다. 나와 와튼MBA 동기인 전 조흥은행장 홍석주 씨는 최고경영자의 덕목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엑시터 1호 한국인 졸업생인 김정원 세종대학 석좌교수는 그에게 졸업논문 아이디어를 제시해 주었다. 현열이는 그분이 미국에서 배운 지식을 조국에서 사용하기 위해서 귀국한 것에 큰 감명을 받았다. 김정원 교수는 나에게 “현열이가 바르게 자라서 흐뭇했습니다.”라는 내용의 이메일을 보내주었다. 그중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만남은 희망제작소의 박원순 변호사님과 이었다.


“박원순 님 제 아들놈 좀 만나 주십시오.”


 나는 뉴욕 아름다운재단의 이사로서 박원순 상임이사를 1년에 한두 번 정도 뉴욕에서 볼 기회가 있었다. 그때마다 그분의 사회에 도움을 주려는 순수한 열정과 사람의 마음을 이끄는 지도력에 감명을 받았다. 그분을 만나게 하려는 이유는 ‘나를 위하지 않는’ 열정이 부족할 때, 그에게 강하게 남아있을 박원순 상임이사의 형상이 식은 열정에 불을 다시 지피게 할 거라는 막연한 바람 때문 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 블로그에 그분의 초상화를 그리고 아들을 만나 좋은 이야기를 해주길 바란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보냈다. 몇 시간 후, 그분으로 부터 기꺼이 만나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리고는 그는 자신의 블로그에 아래와 같은 글을 남겼다.


"그의 이메일의 요청에 따라 그의 블로그를 방문해 보았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바로 나의 초상화가 거기 걸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려놓았습니다. 아들을 한번 만나 멘토 역할을 해 달라는 것이지요. 어느 아버지가 아들을 생각하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마음뿐인 경우가 많지요. 그런데 이 분은 자신이 만나보고 판단한 사람 가운데 21살의 아들에게 도움이 될 만하다는 사람들만 골라 자신의 아들을 위해 이렇게 정중하게 멘토가 되어주기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자신이 정성들여 그 분의 초상화를 그려서 말입니다. 바로 미국 뉴욕에서 회계사 일을 하는 박중련 선생의 이야기입니다.

참으로 감동입니다. 그리고 참 부끄럽습니다. 나는 내 아들을 위해 이렇게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는 것이 바빠 아들의 성장과 발전을 위하여 아무런 일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박중련 회계사님은 늘 잔잔하고 조용하면서도 세상 사람들을 위해, 사회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빠짐없이 수행해 내고 있는 분입니다. 그는 나를 칭찬하고 자신의 아들을 위한 멘토로 선정했지만 나는 그가 오히려 그런 찬사를 받아야 할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해외의 교포로 살면서 생존하고 적응하기도 바쁜 상황에서 동포사회를 위해서 그런 희생과 헌신을 한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저야말로 박중련 회계사님을 존경합니다. 그렇지만 그가 요청해 온 귀한 일을 거부할 수도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바른 자세와 열정으로 세상을 살고 있는 이 분을 위해 기꺼이 그 아드님 박현열 군을 맞아들여 그가 원하는 만큼 함께 하면서 그에게 도움을 주고자 합니다. 참 좋은 아버지와 아들입니다. 이런 좋은 분들과 함께 이 시대를 살 수 있어 감사합니다. (원순닷컴)“


21살 청년 현열이가 짧은 기간에 위와 같은 분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며 특권이다. 현열이는 젊은 청년에게 귀중한 시간을 내어주신 분들에게 감사한 생각을 갖고 있으며 심지어는 거룩한 부담감마저 느꼈다. 그는 위의 일곱 분을 만나고 나서 자신이 느낀 바를 내게 보내주었다. 박원순 변호사님을 만나고 나서는 “그분이 선(善)의 향을 발한다. He emanates goodness."라는 표현을 썼다.

고려대학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 온 현열이는 한국생활에 대해 대 만족했다. 학문적으로는 미국에서 배우기 힘든 한국역사를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었고, 한국의 미래 지도자들이 재학하는 고려대학에서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한국생활을 크게 ‘만남’이라고 귀결 지었다. 친척들을 만나면서 뿌리를 생각해 보았고, 고대에서 평생 교류하며 지낼 교우들을 사귀었고, 아빠가 연결해 준 멘토들에게서 이 시대 한국의 지도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국에서의 인턴생활

유펜에 돌아와서는 고대 홍보대사를 하면서 후배들에게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대해서 자문해 주었다. 그 결과 와튼학부 3학년 학생 4명이 2010년 9월 학기에 고대경영대에 교환학생으로 등록했다. 와튼학부에서도 한 외국대학에 4명이 교환학생으로 간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그는 자신의 작은 노력이 대학 간의 프로그램을 한 단계 도약시키는데 기여했다는데 뿌듯해했다.

대학 3학년 여름방학 때에는 미국의 재정분야 컨설팅 회사인 올리버 와이맨의 서울지점에서 인턴생활을 했다. 이곳에서는 한국어를 주로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지난 해 한국을 떠나오면서 부족하다고 느꼈던 한국어 실력을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었다. 실제로 인턴을 마칠 즈음에는 평소 갖고 있던 미국식 한국어 억양도 사라졌고, 한국 사람들과의 만남도 자연스러워졌다.

인턴 직을 찾는 과정에서, 그는 동포 대학생들을 위한 모임을 주간하면서 알게 된 선배들로 부터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도움을 받았다. 현열이는 대학 2학년 때 미국동포대학생들이 매년 모여서 훌륭한 동포들의 연설을 듣고 분야별로 각종세미나를 여는 KASCON 모임에서 프로그램 디렉터를 지냈다. 그러면서 자연히 23년 된 이 모임을 주간했던 선배들과 만나거나 연락하며 지냈다. 그분들은 대부분 미국의 컨설팅이나 증권회사에서 중책을 맡고 있는데, 재단을 만들어서 이 모임이 영구히 미국동포사회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게 재정적 보조와 조언을 해주고 있다. 그분들이 자신을 위해 이력서를 서로 돌리는 것을 보고 가슴이 찡했다고 한다.

이번 인턴생활을 하면서는 아빠의 도움 없이 스스로 멘토들을 찾아 다녔다. 전 칼라일 그룹 한국지사장이이며 그의 엑시터와 와튼 선배인 존 권John Kwun은 첫 직장을 선택할 때 10년 후에 어떤 일을 할지를 염두에 두고 결정하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그리고 정덕구 이사장님은 직장은 일종의 컨베이어 벨트와 같아서 한 번 타면 그 안에서 뒤척일 수는 있지만 다른 벨트로 갈아타기 힘들다는 말씀을 해 주셨다.


현열이는 자신의 한국생활을 크게 ‘만남’이라고 귀결 지었다. 친척들을 만나면서 뿌리를 생각해 보았고, 고대에서 평생 교류하며 지낼 교우들을 사귀었고, 아빠가 연결해 준 멘토들에게서 이 시대 한국의 지도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직장에서는 동료와 고객들과의 만남이 있었다. 한국에서의 대학과 인턴생활, 그리고 한국어와 중국어 학습은 현열이가 계획한 교육플랜이다. 나는 그가 세계무대의 중심이 극동아시아로 옮겨가는 역사의 흐름 한 가운데서 비중 있는 역활을 담당하길 기대한다.


세계 1%를 꿈꾸면 두려움없이 떠나라. http://www.youtube.com/watch?v=Skw6Nv8pSlY&feature=sea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