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펜에서는 대학 3학년 때 전체 대학생의 1/4인 600명 정도가 해외 교환학생으로 떠난다. 현열이도 자신의 전공인 동아시아학과 재정학을 공부할 수 있는 대학을 찾았다. 그는 유펜이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갖고 있는 아시아 3개 대학 중에 하나인 고려대학에서 한학기 공부하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현열이는 엑시터를 마치고 유펜에 진학하기 전 여름방학동안 연세대학의 한국어 프로그램에 다녔다. 대학 1학년을 마친 후에는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프린스턴대학 주간 북경사범대학 여름방학 프로그램에서 2개월 동안 대학 2-3학년 중국어 코스를 했다. 고대로 향하기 전 한 달간은 중국 훈춘에서 선교활동도 했다.
이번이 학생으로 두 번째 한국 방문이고 성숙한 나이에 모국에서 정식 대학생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를 위해 평생 잊지 못할 멘토들과의 만남을 준비했다.
고려대학에서의 기숙사생활
고려대학 경영대학과 유펜의 와튼스쿨은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갖고 있어서 매년 수 명의 고대학생들이 유펜에 와서 공부한다. 반면에 유펜 학생들은 이 프로그램을 잘 활용하지 않았다. 비슷한 이유로 현지 고대학생들도 왜 옥스퍼드나 캠브리지를 가지 않고 이곳에 왔는가하고 의아해 했다. 그는 내심 고려대학이그가 심혈을 기우려 내린 결정이었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했다. 현열이는 유펜에 교환학생으로 왔었던 고대 학생들과 교환학생을 돕는 동아리 회원들의 도움으로 쉽게 캠퍼스에 적응했다.
현열이는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집안에서 한국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언어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의 한국어 실력이 한글로 비즈니스 페이퍼를 쓸 정도는 아직 아니다. 고려대학은 전체 강의의 60%를 영어로 가르치기 때문에 언어도 별 문제가 안 되었다. 그는 한국미술사와 한국역사를 포함해서 동아시아 학과 재정학 코스를 잘 섞어서 6과목을 택했다.
엑시터의 하크네스 테이블에서 익힌 학습태도를 강의시간에 그대로 적용했다. 그는 항상 예습을 하기 때문에 높은 질의 질문을 하고 수준 높은 대화를 나눈다. 그는 고대에서도 유펜에서와 비슷한 강도로 학업에 임했다. 어디에 있던지 가만히 있지 않는 그는 고대 경영신문에 기고도 하고 고대경영대학 영문 안내책자에 인터뷰도 하면서 자신의 발자취를 남겼다. 아마도 그가 고대를 4년 다녔다면 분명히 학생회장에 출마했을 것이다.
숙소는 대학 정문 바로 앞에 있는 외국학생 전용기숙사로 정했다. 그래서 하루 24시간동안 대학생활을 100% 만끽했다. 고대 특유의 삼겹살과 막걸리 문화를 경험해 보았으며, 몇 번의 소개팅도 했다. 당구장에서 자장면을 시켜서 먹고, 고구마 장수 장갑을 끼고 치는 4구 당구의 매력에도 푹 빠졌다. 그는 일반 한국학생들처럼 한글 텍스트를 자유자재로 한다. 그리고 지하철과 국철을 타고 전국 어디든지 갈 수 있다. 그는 거의 완벽한 한국 대학생으로 살았지만 한 가지 부족함을 느꼈다. 그는 교환학생으로 있으면서 한국어 실력이 부쩍 늘었는데도 충분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가졌다. 현재 유펜에 복학해서는 고대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홍보하면서 와튼과 고대 경영대학과의 교류 활성화에 도움을 주고 있다. 그의 노력으로 내년에는 와튼학생 5명이 고대 경영대학에 신청한 상태이다. 현열이는 와튼과 고대경영대학의 교환학생 프로그램이 개설된 이래 와튼에서 처음 간 학생이었다. 그리고 그는 단번에 고대경영대를 와튼에서 가장 Popular 한 프로그램으로 만들었다. 그의 활약상은 아래 링크에 담겨있다.
http://sa.oip.upenn.edu/index.cfm?FuseAction=Announcements.Announcement&Announcement_ID=2#alpak
아빠를 통한 멘토들과의 만남
아들이 고려대학에서 공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을 때 나는 그의 한국생활을 평생 기억에 남는 경험으로 간직할 수 있게 이벤트를 꾸몄다. 나는 그가 한국으로 떠날 때 와튼 모자 10개를 사서 그의 짐 속에 꾸려 넣었다. 그 모자는 현열이가 멘토들과 만날 때 드릴 조그마한 선물이다. 나는 그에게 현열이가 만나 볼 분들의 리스트를 적어보았다. 내가 알고 지내는 분들은 이메일로 쉽게 연락이 다았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은 여러 경로를 통해야 했다. 거기다가 최근에 발견한 나의 스케치 재질을 백분 살려 만나는 분들의 사진을 인터넷에서 다운받아 스케치한 그림을 더 챙겼다. 연필로 스케치를 해 나가면서 나는 이 분들이 현열이에게 어떤 조언을 해 줄까 기대하며 그림에 나의 감사한 마음을 담았다. 모두 일곱 명의 초상화를 그렸고 그분들에 대한 글과 그림을 내 블로그에 올렸다.
이 프로젝트는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기엔 상당히 황당한 것이었다. 나는 현열이가 지도자들을 만나면서 지적인 교제를 할 만큼 충분히 준비되었다고 생각해서 시도했다. 처음에는 현열이도 어른들을 매주 만나는 것에 부담감을 느꼈지만, 아빠의 마음을 헤아리고는 그분들만이 줄 수 있는 삶의 지혜를 느껴보려고 노력했다. 그는 미국에 와서는 엄마에게 "멘토들이 엄마가 음식 맛있게 만드는 줄 알아요." 하고 말했다. 그분들이 만날때 마다 식당을 고르려고 어디 음식이 가장 맛있었냐고 물어서, "엄마 음식이 가장 맛있는데요?"라고 했다고 한다. 처음 만나는 분들과 서먹한 분위기를 깨려는 그의 위트와 지혜를 볼 수 있다.
현열이가 만난 분들은 모두 그에게 호감을 갖고 기대 이상의 대접을 해 주었다. 이 책의 서문을 써주신 정덕구 전 산자부장관께서는 현열이에게 니어재단에서 하는 학술대회 차 오시는 세계 저명인사의 수행과 콘퍼런스의 일정들을 맡겼다. 세아상역의 김웅기 회장은 그를 인도네시아에서 공장 부지를 구매하는데 자비로 동행케 했다. 그분은 현열이를 만나고 “맑고 순수했습니다.”라는 평을 해 주었다. 위의 두 분은 현열이를 가족들과의 모임에 자주 초대해 주셨다.
그가 만나본 분 중에는 와튼에서 내가 만난 지인이 셋 있었다. 그분들은 이제 현열이의 대학선배이기도 하다. 당시 재정학 박사과정에 있던 장하성 고려대학 경영대학장은 당연히 만날 수 있는 분이어서 큰 부담이 없었다. 현열이를 만나 본 그는 ”똑똑하고 성숙합니다.“라고 칭찬해 주었다. 와튼학부 1년 후배인 김진겸 SC제일은행 부행장과의 만남은 구면이어서 편안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는데 그에게 Trading Floor를 보여주며 격려해 주었다. 나와 와튼MBA 동기인 전 조흥은행장 홍석주 씨는 최고경영자의 덕목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엑시터 1호 한국인 졸업생인 김정원 세종대학 석좌교수는 그에게 졸업논문 아이디어를 제시해 주었다. 현열이는 그분이 미국에서 배운 지식을 조국을 위해 사용하기 위해 귀국한 것에 큰 감명을 받았다. 김정원 교수는 나에게 “현열이가 바르게 자라서 흐뭇했습니다.”라는 내용의 이메일을 보내주었다. 그중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만남은 희망제작소의 박원순 상임이사와 였다.
“박원순 님 제 아들놈 좀 만나 주십시오.”
나는 뉴욕 아름다운재단의 이사로서 박원순 상임이사를 1년에 한 두 번 정도 뉴욕에서 볼 기회가 있다. 그때마다 그의 사회에 도움을 주려는 순수한 열정과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지도력에 감명을 받았다. 그 분을 만나게 하는 이유는 일을 보고 배우게 하는 것도 있지만, 그에게 ‘나를 위하지 않는’ 열정이 부족할 때, 강하게 남아있을 박원순 상임이사의 형상이 식은 열정에 불을 다시 지피게 할거라는 바람 때문 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 블로그에 박원순 상임이사의 초상화를 그리고 아들을 만나서 그에게 좋은 이야기를 해주길 바란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보냈다. 몇 시간 후, 박원순 상임이사로 부터 기꺼이 만나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리고는 그는 자신의 블로그에 아래와 같은 글을 남겼다.
"그의 이메일의 요청에 따라 그의 블로그를 방문해 보았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바로 나의 초상화가 거기 걸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려놓았습니다. 아들을 한번 만나 멘토 역할을 해 달라는 것이지요. 어느 아버지가 아들을 생각하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마음뿐인 경우가 많지요. 그런데 이 분은 자신이 만나보고 판단한 사람 가운데 21살의 아들에게 도움이 될 만하다는 사람들만 골라 자신의 아들을 위해 이렇게 정중하게 멘토가 되어주기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자신이 정성들여 그 분의 초상화를 그려서 말입니다. 바로 미국 뉴욕에서 회계사 일을 하는 박중련 선생의 이야기입니다.
참으로 감동입니다. 그리고 참 부끄럽습니다. 나는 내 아들을 위해 이렇게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는 것이 바빠 아들의 성장과 발전을 위하여 아무런 일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박중련 회계사님은 늘 잔잔하고 조용하면서도 세상 사람들을 위해, 사회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빠짐없이 수행해 내고 있는 분입니다. 그는 나를 칭찬하고 자신의 아들을 위한 멘토로 선정했지만 나는 그가 오히려 그런 찬사를 받아야 할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해외의 교포로 살면서 생존하고 적응하기도 바쁜 상황에서 동포사회를 위해서 그런 희생과 헌신을 한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저야말로 박중련 회계사님을 존경합니다. 그렇지만 그가 요청해 온 귀한 일을 거부할 수도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바른 자세와 열정으로 세상을 살고 있는 이 분을 위해 기꺼이 그 아드님 박현열 군을 맞아들여 그가 원하는 만큼 함께 하면서 그에게 도움을 주고자 합니다. 참 좋은 아버지와 아들입니다. 이런 좋은 분들과 함께 이 시대를 살 수 있어 감사합니다. (원순닷컴)“
21살 청년 현열이가 짧은 기간에 위와 같은 분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며 특권이었다. 현열이는 젊은 청년에게 귀중한 시간을 내어주신 분들에게 감사한 생각을 갖고 있으며 심지어는 거룩한 부담감마저 느꼈다. 현열이는 위의 일곱 분을 만나고 나서 자신이 느낀 바를 내게 보내주었다. 박원순 상임이사를 만나고 나서는 “그분이 덕의 향을 발한다. He emanates goodness."라는 표현을 썼다.
고려대학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 온 현열이는 한국생활에 대해 만족감을 표시했다. 학문적으로는 미국에서 배우기 힘든 한국역사를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었고, 한국의 미래 리더들이 재학하는 고려대학에서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한국생활을 ‘만남’이라고 귀결했다. 그는 친척들을 만나면서 뿌리를 생각해 보았고, 고대에서 평생 교류하며 지낼 교우들을 사귀었고, 아빠가 연결해 준 멘토들을 만나면서 이시대 한국 지도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