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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된다는 것

박중련 2010. 2. 11. 10:40

                                      2010년 2월10일 뉴욕지역에 내린 폭설


현열이는 방학 때마다 아빠와 만나면서 성장하는 자신에 대해 ‘Coming Home'이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썼다. 10학년 말에 쓴 글이다.


   버스가 멈추자, 좌석 위에 있는 깜박등이 빤짝거리기 시작하면서 그 밑에 있는 지친 학생들을 깨우고 있었다. 차 바깥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면서 빽빽이 모여 있는 부모님들 틈에서 스타벅스 유리창에 기대고 있는 아빠의 모습이 보였다. 지난 겨울방학 때보다 아빠의 앞이마는 주름졌고, 자랑스러운 진한 눈썹은 얇아졌으며, 하얀 반점들이 머리표피 전반에 스며들며 그의 까만 머리를 파 들어가려고 전쟁 중이었다. 내가 만약 보딩스쿨에 가지 않았다면 이러한 그의 미묘한 외관상의 차이점들을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방학 때마다 나는 부모님의 늙어가는 모습을 보아야 했고 냉혹한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이러한 변화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차를 타고 5시간 걸려 뉴햄프셔 주 엑시터 시에 처음 갔을 때를 기억해 본다. 나는 유명한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에 다닐 수 있는 특권을 누리며 내 또래 학생들이 4년 후에나 감사하게 생각하는 경험을 지금하고 있다. 그때는 짐을 싸고, 추수감사절, 성탄절, 또는 봄방학이 되어 3개월 후에 집에 돌아와서 짐을 다시 푸는 것의 의미를 확실히 몰랐다. 아빠가 학교에서 나를 내려놓고 집으로 향할 때마다 그가 내일 또는 그 다음날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을지를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형상을 그려 보고 다시 짜 맞추어야 알아볼 수 있는 아빠의 변화된 모습을 보게 되는 3개월 후까지, 나는 그의 마지막 모습을 가슴에 지니고 있어야 했다.

 

  내가 처음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아빠와 나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공백이 존재했었다. 우리의 포옹은 사랑스럽고 진실 되기보다는 이상하게 형식적이거나 부자연스러웠다. 나의 길고 단단해진 손은 그 동안 아빠를 포옹할 때 감쌌던 방향에서 어긋 나곤했다. 방학이 되어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집에 돌아왔지만 결코 내 집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없었다. 항상 나는 “그래 이제 집에 왔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기까지 집 구석구석과 다시 친숙해질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집은 나를 기억하기까지 아마 며칠쯤은 더 걸릴 거라고 생각됐다.

  

 나무와 숲으로 둘려진 나의 어린 시절 넓은 뒷마당은 들쭉날쭉하게 깍은 잔디밭의 한 부분같이 작아보였다. 어렸을 때는 축구공으로 한 번에 양끝까지 차기 힘들었지만 이제는 그 둥근 것을 양쪽 두터운 숲속에서 찾아 헤매지 않고는 찰 수가 없다. 잔디밭 옆에는 벽돌로 깔아 만든 나의 어린 시절 작은 농구장이 쉬고 있었다. 이 경우 ‘쉬다.’라는 말은 농구장의 깊은 정지 상태에 대해 관대하고 완곡한 표현일 것이다. 한때 생동감이 돌고 말끔했던 농구장은 화분과 화단장비들이 채워진 상자들로 넘쳐 있었으며, 구석의 바람 빠진 농구공은 이들이 자신의 영토를 에워싸는 것을 방어하지 못한 채 쳐 박혀 있었다. 이 낡은 농구공과 마찬가지로, 내 삶의 변화에 대한 이러한 불평들은, 아마 끊임없이 변해가는 내 집에 내가 일부가 아니라는 허탈감에서 왔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내 간섭이나 내 명령을 받지 않고 내가 없는 상태에서 진행되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나는 내 삶을 떠나서 한때 내 집이라고 여겼던 모든 것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소름끼치게도 전혀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내가 부모님의 노화에 대해 전혀 손을 쓸 수 없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나 내가 만약 집에서 학교를 다녔다면, 최소한 그러한 변화들을 점차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고 주위에서 일어난 일들을 육안으로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부모님과 만나는 처음 1-2분 동안 그들의 지난 3개월간의 생활을 간파하려고 할 때마다 고통을 내 몸 곳곳에서 느끼게 된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친구들이 내게 “집에서 멀리 떨어진 학교에 다녀서 얼마나 행복하냐?”라고 말할 때 심한 분노를 느끼게 된다. 그럴 때면 그들의 무지에 대한 동정심보다는 내 처지에 대한 안타까움이 나를 엄습하고 그들을 부러워하는 마음이 내안에 확산된다.

  

 어쩌면 나는 두 세계가 조화를 이루는 복합생활 어려움들을 아직 터득 못했는지 모른다. 내가 우리 뒤뜰 우리 가족 우리 집에 대해서 걱정하게 될 때, 또는 내 또래 학생이 철없이 굴려고 하는 것이 정말 이상하게 느껴질 때, 내게 어른이 되는 가속도가 붙을 거라는 사실을 상상하기 힘들다. 삶은 가차 없이 내가 조정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속도로 흘러간다. 나는 단지 그에 굴복하고 따라갈 수밖에 없다. 아마도 나는 그러면서 내가 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시간을 가족과 함께 보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