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시터에서 기숙사 친구들과 함께(맨 왼쪽이 현열이다.)
엑시터에서의 4년을 추억하고 감사하는 내용의 글. 원제는 “My Four Years At Exeter'.
엑시터에서 4년을 보낸 지금, 책꽂이에는 내가 읽은 책들로 가득하고 컴퓨터 하드 드라이브에는 내가 쓴 문서들로 꽉 채워져 있다. 그것들이 아마도 내가 엑시터 교육을 받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엑시터 교육이 내 몸 속에 살아 있다는 증거는 결코 될 수 없다.
기숙사에 첫 발을 내 디딘 순간부터, 나는 엑시터가 나를 테스트 할 장소임을 감지했다. 내가 엑시터에서 우수한 학생이 되겠다고 계획했던 바로 그 곳 17호실 안을 흘긋 둘러보았을 때, 나와 매우 다르게 생긴 두 사람이 반겨 주었다. 한 명은 롱아일랜드에서 온 펑크 음악 애호가이며 인도계 미국인인 닉Nick이었고, 다른 한 명은 메인 주 남쪽에서 온 몸집이 큰 백인 미식축구선수인 카일Kyle이었다. 그리고는 뉴저지 주에서 온 축구를 사랑하는 작은 키에 깡마른 한국계 미국인인 나였다. 닉과 카일은 엑시터 첫 해의 내 룸메이트들이었다. 그런데 앞으로 살게 될 숙소를 자세히 보니까, 우리에게 배정된 방은 둘 뿐이었다. 우리 기숙사의 다른 학생들은 모두 자신의 방을 갖고 있는데 반해 17호실의 우리 세 명은 두 개의 방을 나눠 써야만 했다.
비록 우리가 캠퍼스에 도착한 지 하루도 안 지났지만, 우리는 공식적인 엑시터 학생이었기 때문에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머리를 짜기 시작했다. 숙고 끝에 우리는 한 방은 침실로, 다른 방은 공부방으로 사용하는 게 가장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가 이러한 처지에 놓인 것에 대해 무시당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고, 17호실에서 살았던 그 첫해가 무난했다고 말한다면 분명히 거짓말일 것이다. 우리는 입는 옷에서부터 즐기는 음악까지 모두가 달랐다. 비좁은 공간이었기에, 우리 중 한 명은 계속 방안에 있는 다른 사람을 자극하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결국 우리는 평화롭게 지내기 위해 타협이 필요했다. 거의 매일 우리는 상대방의 목을 죄고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 경험은 우리 모두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 셋은 이러한 차이점들에도 불구하고 서로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갖고 첫 해를 마쳤다. 나는 17호실의 상황을 통해서 엑시터에서 직면할 수 있는 여러 문제들이, 기숙사나 교실 내에서나 간에, 인내를 통해서 해결될 수 있음을 발견했다.
엑시터에서 지낸 4년 동안, 나는 세상에는 총명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학생들 한 무리를 뉴햄프셔 주의 아늑하고 조그마한 엑시터라는 마을에 모아 놓은 학교에 다니면서, 뛰어난 동료들 사이에서 자주 방황하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엑시터 학생들은 여러 분야에서 빛났다. 내가 그들의 그림자에 가려 있다는 느낌은 교실에서 가장 많이 경험했다. 예를 들면 엑시터 첫 학기 때, 나는 여러 과목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내가 다녔던 중학교는 엑시터의 혹독한 학습방법을 충분히 준비시켜 주지 못했다. 한 예로 나는 하크네스 교육방법에 적응하느라 고생했다. 그때까지 나는 전통적인 교실에서 교과서를 통한 수업을 받아왔다. 그래서 하크네스 테이블에 둘러앉는 것은 물론 내 동료들로부터 배울 준비는 더욱이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엑시터 교육방식에 나를 맞추는 것보다 더욱 힘들었던 것은 수업에 대한 올바른 자세를 갖는 것이었다.
중학교에서는 항상 최 상위권을 유지했었기 때문에, 나는 어디에서든지 늘 좋은 성적을 받을 거라고 기대했었다. 그처럼 단순했다. 공부를 얼마나 했든 간에 나는 늘 좋은 결과만을 기대했었다. 그러나 엑시터에 도착해서, 나는 곧 “현실은 그렇지 않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첫 한 달 동안, 내가 기대하고 지금까지 받아왔던 성적들을 전혀 받지 못했다. 내 노력은 모자랐으며, 그것을 증명해주듯 전에는 받아본 적이 없었던 점수들을 시험지 위에서 보기 시작했다. 힘든 상황이 찾아올 때마다, 나는 나 자신을 더욱 압박했다. 내게 주어진 모든 문제들과 맞서 싸우고, 그 위에 승리자로 일어서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내가 완전한 무력감에 빠지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심하게 압도되어서 결국 ’이것을 나 혼자는 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바로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했다. 새로이 겸손한 자세를 가지니까 전에는 창피해서 하지 않았던 ’도움 요청하는 것‘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선생님들에게 숙제에 대해서 질문을 했고, 교실에서 다루었던 내용 중에서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추가 도움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수학문제는 예전만큼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꽤 빠르게 나는 모든 곳에 이 새로운 자세를 적용하였다. 기숙사에서는 숙제를 하다 잘 모르면 선배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축구장에서는 코치에게 어떻게 하면 팀에 공헌을 잘할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교회에서는 목사님에게 한동안 나에게 수수께끼였던 신학에 관한 질문들을 했다.
엑시터가 나를 위해 준비해 놓은 광범위한 네트워크에 한 번 연결되자 모든 것이 훨씬 덜 불가능해 보였다. 나는 엑시터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접할 수 있는 모든 사람과 모든 것으로부터 배우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오직 그럴 때만, 엑시터 학생이 지니게 되는 믿기 힘들 정도의 높은 잠재력에 도달할 것이다.
엑시터는 내게 세계 곳곳에서 온 사람들과 만날 기회를 제공하였다. 나는 한국, 일본, 나이지리아, 에콰도르에서 온 학생들과 함께 축구를 했다. 토요일 밤에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중국에서 온 학생들과 함께 보내기도 했다. 교회에서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부터 캘리포니아 주까지 모든 지역에서 온 학생들과 예배에 참석했다. 십대 학생인 내가 매일 이런 다양한 그룹의 친구들과 만날 수 있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엑시터에서 나의 동료들을 알게 되었고 그들의 진가를 인정하게 되었지만, 내가 진정 가깝게 여기는 친구들은 따로 있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모두 내 기숙사 안에서 찾을 수 있다. 그들 중 상당수는 나와 4년간 기숙사에서 거의 모든 것을 함께 나누며 지냈다. 밤늦게 탁구시합을 하거나 앉아서 떠들어 대는 일까지, 그들은 항상 나를 위해 그곳에 있었다. 우리는 처음에 모르는 사람으로 시작해서 친구가 되었고, 마침내는 형제로 발전했다. 이러한 진화야말로 내가 목격했던 가장 아름다운 광경들 중에 하나이다.
이 형제들은 여러 지역에서 왔으며 다양한 연령층을 포함하고 있다. 이 형제들은 흑인, 백인, 동양인, 남미인들 이다. 이 형제들은 기독교, 불교, 무교, 힌두교인 들이다. 무엇보다 중요하게도, 이 형제들은 내 집(home)에서 살고 있지 않는 나의 가족이다. 나의 엑시터 경험은 기숙사와 그의 구성원들이 없었다면 완벽하지 못했을 것이다. 10년, 20년, 30년 뒤, 엑시터 친구들의 이름과 추억은 세월과 함께 희미해져 갈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 가족인 기숙사 친구들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를 안팎으로 너무나 잘 알면서 자랐기 때문이다.
엑시터 경험은 모든 부분을 종합한 것보다 훨씬 더 크다. 나는 여러 스포츠 팀에서 뛰었고, 수 없이 많은 수업에 출석했고, 많은 재미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러나 여기서 보낸 시간을 돌이켜볼 때, 이러한 면들은 내 경험을 요약하는데 근처에 오지도 못한다. 엑시터 교육은 학구적인 면을 훨씬 넘어선 영역에 존재한다. 이것은 하루하루 나의 생애를 통해 골고루 미치고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나를 위하지 않는 정신, 참을성, 우정에 대한 교훈들은 지금도 확실히 살아 있고, 남은 생애 동안에도 살아서 나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모든 인간관계는 행복과 웃음의 친근함이 넘치는 색상과 함께, 싸움, 불협화음, 침묵의 순간들로 그려져 있다. 엑시터에서의 시간이 행복의 연속이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솔직히 거짓말일 것이다. 반면에 그것은 하나의 관계였고, 인내하는 관계였으며, 그리고 그 모든 순간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