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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구 니어재단 이사장

박중련 2009. 10. 2. 13:49

                                                           (아빠가 스케치한 정덕구 이사장님의 모습)


정덕구 니어재단 이사장님과의 만남은 50년전으로 올라간다.  나는 안양에서 의사이신 외할아버지께서 나를 받아서 서울에서 초등학교 입학하기까지 7년을 그곳에서 살았고 방학 때마다 버스를 타고 내려가 지냈다. 그때 정 이사장님은 내 기억에 안양 새시장 입구 왼쪽켠에 비교적 넓은 집에 살았고, 집 주위에는 비둘기장이 있어서 비둘기들이 늘 맴돌았다. 약 40-50년전 당시 안양은 자그마한 읍에 불과했으며 같은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끼리는 상대방 집에 숫가락이 몇개인지 알 정도로 가깝게 지냈다. 정 이사장님의 어머니는 2009년 만 105세로 돌아가신 나의 외할머니가 가깝게 지낸 몇분들 중 한 분이었다. 외할머니는 정신이 맑으셨던 몇년 전까지만 해도 이사장님 가족이 안양에 정착하신 이야기 그 형제 자매들이 공부를 잘한 이야기 등을 내게 들려주었다. 그 분의 형님과 안양초등학교 출신인 외삼촌 이용경 국회의원과는 친구지간이다. 

 

내가 안양에서 자랄때 외할머니는 내 머리를 지팡이 삼아 시장에 장을 보셨다. 안양 1번지에 있던 텃밭에서 채소등을 가꾸시고 재래식 부엌에서 지내셔서 허리가 굽으셨는데 내 머리에 손을 얹으시면 지면에서 100도 정도 뒤로 허리가 펴진채로 걸으셨다. 방학때는 내가 왔다고 장에 가서 생닭을 사 집에서 머리를 비틀고 털을 빼서 삼계탕을 끓여주시기도 했다. 그리고 곗돈을 계주에게 보낼 때면 내 배에다 곗돈 싼 복대를 채우셨다. 동막골에서나 볼수 있는 일들 이었다. 현재 출석 교인 5천명이 되는 안양제일교회는 외할아버지집 안방과 마루 그리고 건너방을 터서 예배를 보며 시작했는데, 외할아버지가 장로님이셨기 때문에 나는 교인들이 귀엽게 봐주는 장로님 외손자이었다. 이사장님과 내가 이러한 환경에서 만났기때문에 서로에 대한 느낌이 남다르지 않은가 생각된다.


그 때 안양에서 보았던 많은 분들 중에서 정덕구 이사장님과 그의 누님인 정덕희 씨의 모습이 내게 가장 인상적으로 남아있다. 나는 어린나이였지만 항상 명랑하고 총명하신 덕희 누님에게 반했었다. 덕희 누님은 나에게 직접 성경공부를 가르쳐주고 그 집에 놀러가면 동생같이 잘 대해 주셨다. 반면에 이사장님과는 9살 차이로 더 가깝게 지낼 수도 있었지만, 그분이 서울로 고등학교에 통학할 때였고 대학입시부터 고려대학 재학시절에는 행시와 공인회계사 시험을 봐야했기 때문에 교회에서 많이 마주치지는 못했다. 그러나 여름방학때 교회 교육부에서 인근 미군부대의 트럭을 빌려 서해안으로 캠핑을 갈 때면, 곱슬머리이며 검은 뿔테 안경을 쓴 건장한 청년인 이사장님이  미군 운전수와 영어로 우리의 입장을 대변해주곤 했다. 그분은 교회청년부 소속 대학생이었고 나는 초등학생이었기에 주일학교 선생님이나 형으로서 이리저리 교회에서 부딛쳤다. 그리고는 내가 서울에 약수동에 살때 장충체육관앞에서 농구 고연전을 보기위해 줄을 서 있던 그분을 만난 것이 마지막이었다. 후에 나는 1975년 미국으로 이민갔고 정 이사장님은 재무부에 들어갔다. 안양에 있는 정이사장님 집과 우리 외갓집은 계속 교류가 있었지만 나와 그분의 개인적인 테이프는 여기서 끊어졌다. 그리고 약 30년이 흘렀다.

 

이사장님이 재무부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국장직을, IMF 때에는 핵심역활을 담당한 재경부 차관보를 후에는 재경부차관과 산자부 장관이 되면서, 그분은 점점 내가 만나보기 힘든 분이 되었다.  내가 뉴욕에서 금융협의회의 회계업무를 보고 있을때 이사장님이 재경부 차관자격으로 뉴욕을 방문했었다. 그때 내가 금융협의회 담당자에게 그 분을 개인적으로 안다고 하니까, 만약 그분이 나를 기억하면 자기가 저녁을 사겠다고 공언했다. 불행히도 그분이 기억을 못해 나는 저녁을 얻어먹지 못했다. 그분이 나를 기억하려면 내가 외갓집에서 촐랑대고 돌아다니던 모습을 떠올려야 하는데 쉽지 않았을 겄이다. 나는 그분이 관직을 떠나 서울대학 교수로 있었을때 방문해서 안양시절 이야기를 나누며 가까와질 수 있었다. 

 

그분이 국회의원으로 계실때 뉴욕에서 2-3일 스케줄이 빈 날이 있었다. 그때 그분에게 우리 집에서 묵으시는 것을 제안했다. 맨하탄이나 뉴욕 근교의 수백만달러 짜리 집들에 비해 우리집이 비교적 초라할 수도 있지만 최소한 고향집과 같은 편안함을 느낄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눈이 펑펑 쏟아진 겨울 날 우리는 이사장님 부부와 벽난로를 때면서 서로가 알고 있었던 안양 이야기를 나누었고, 동물 발자국이 덤성덤성 띄는 눈덮인 동네 야산을 등산하기도 했다. 안양이야기를 하면서 서로 알고 있는 내용이 일치할 때는 긴 시간이 갈라놓은 서먹서먹한 벽이 허물어져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IMF 때 핵심에 계셨던 그분으로 부터 조국이 힘들었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함께 있으면서 상무관과 재경관이 그분에게 각별히 신경을 쓰는 것을 보고 내가 중요한 분과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사장님이 나에게 뉴욕에서 만나는 분들을 소개하시고 내가 그분들과 좋은 인연을 맺어가기 바라는 말씀하셨을 때 그분의 따뜻한 사랑을 흠뻑느낄 수 있었다. 우리집은 이렇게 전직 장관도 오시지만, 해외 선교사님 가족이 안식년을 취하러 뉴욕에 와서 몇달 묵으시기도 하고  한국의 나의 모교 은사님들이 북미은사초청으로 뉴욕에 오실때면 계시는 사랑채 공간이다. 모두들 떠나실때면 부담없이 편안히 잘 지냈다고 말씀 하신다. 


이사장님은 그 후 뉴욕에 몇 번 오셨는데 그 때마다 우리를 꼭 찾으셨다. 지난번 방문에서는 그분을 위한 디너모임에 뉴욕에서 초대하고 싶은 한 부부를 권해서 우리부부가 초대되어 간적이 있다. 나는 그분에게 내가 현열이와 함께 쓴 "세계 1%를 꿈꾸면 두려움 없이 떠나라."의 원고를 드리고 한 번 읽어보시게 했다. 그분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다 읽으시고 후에 내 책의 서문을 써주셨다. 이사장님은 현재 동북아 경제문제를 다루는 Think Tank인 니어재단일을 보시고 있다. 나도 그분의 중국과 한국에 대한 저서들을 읽었는데,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는 주제인데도 과거에 대한 어떤 분석에서는 무릎을 치면서"아 그랬었구나" 하는 탄성을 자아내게 했으며, 동북아의 미래에 대해서는 미래학자와 같은 예리한 분석에 놀라움을 금치못했다. 그분은 북경대학과 중국경제 지도자들이 매년 초대해서 중국을 포함한 동북아 경제에 대한 조언을 듣는 인사 중에 한 분이다. 


오늘 내가 그분에 대해서 쓰게 된 것은 현열이가 10월 5일 그분을 방문하게 되서이다. 나는 현열이가 한국에 있는동안 내가 알고 지내는 석학이나 재계지도자들과의 만남을 주선해주려고 한다. 대학 3학년인 어린 청년의 방문을, 그분은 내가 e-mail 보낸지 몇시간만에 가장 가까운 날로 잡아 현열이에게 알려주셨다.  현열이는 한국 최고의 경제지도자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며, 정 이사장님은 호기심많고 패기있는 동포학생을 보게 될 것이다. 나는 그분이 현열이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말 한마디를 해주시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