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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먹고 사는 사람

박중련 2009. 9. 24. 14:11


내 인생에 있어서 5번 정도 남들이 하기 힘든 것을 성취해 보았는데, 그 중에 첫 번째가 바로 양정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74년 장학퀴즈에 나가 주말과 월말장원을 거쳐 제2기 기말 결선에 오른 경험이다. 그리고는 미국에 18세에 와서 검정고시를 거쳐 유펜와튼스쿨에 진학한 것이 두 번째 성취이고, 와튼스쿨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와튼 MBA에 들어간 것이 세 번째 성취라고 생각된다.  네번째는 2003년에 미국대학학자금 가이드를 3천여권을 발행해서 모두 매진한 경험이다. 그 책은 상당히 많은 분들로 부터 큰 도움이 되었다는 감사전화를 받아서 보람을 느끼게 했다.  마지막으로 아들과 함께 쓴 "세계1%를 꿈꾸면 두려움 없이 떠나라"(동아일보 출판사 발간)라는 책도 매진이 되어서 조기유학을 꿈꾸는 학생들과 그 학부모들에게 도움을 준 일이다.


그런데 나는 위와 같은 일들과는 전혀관계 없는 학생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때까지 매년 "주의산만"이라는 단어가 생활기록부에 따라다녔다. 공부에서도 와튼스쿨에 유학오는 대한민국의 최우수 학생들과는 거리가 먼 평준화된 학교에서 Top 10% 정도하던 학생이었다. 나도 남들처럼 머리는 좋은데 공부는 안했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지만, 불행히도 중학교때 진학지도 선생님은 나에게 대학은 갈 정도의 IQ를 갖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런데 당시 나와 비슷한 소리를 들은  친구들이 지금 모두 박사가 되어있다. 과연 그런 것이 무슨의미가 있는지 생각해 본다.  여하간 나는 그말을 믿고 머리가 나쁘기때문에 더 열심히 해야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내가 그러한 실망스러운 위치에 있었는데도 남들이 한 번 나오기 힘든 와튼스쿨을 두 번이나 나왔고, 책이라곤 교과서밖에 읽어본 적이 없어도 책을 두 번 발간해서 모두 매진하는 경험을 하였다.

 

나에게 어떤 면이 있어서 위와 같은 일들을 할 수 있었을까? 나를 그 자리에 까지 인도해 준것은 바로 목표를 정해놓고 정진해가는 나의 생활습관 이었다. 나는 장학퀴즈가 1973년 처음 방영되었을때 나도 저런 곳에 나가봤으면 하고 바랬다. 그래서 백과사전 등을 보면서 내가 실제 경험해 볼 수 없는 상식들을 섭렵하였다. 장학퀴즈 2기 마지막 주말 장원을 뽑는 예비시험에 합격해서 방송국으로부터 나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문제를 별로 많이 맞추지도 못했는데 다른 학생들이 틀리고 감점을 받으면서 어부지리로 주말장원이 되었다. 다음 주에 있었던 월말결선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래서 나의 등록상표는 "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2기 기말결선에서도 몇개 맞추면서 선두그룹에 섰고, 마지막 문제에서 내가 부저를 눌렀다. 그때 맞추면 기말장원이 되는 순간이었다. 모든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그러나 나는 틀린 답을 말했고 동시에 꿈에서 깨어났다. 그날 기말장원에 오른 학생은 나보다 1학년 위인 경기고등학교 3학년 학생으로 후에 서울대 의대에 수석입학했다.

 

한국에서 대학입시를 놓고 공부하다가 18살에  미국에 와서 성인학교를 다니고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졸업자격증을 받았다. 미국와서 대학가기 전까지 2년간의 공백기가 있었는데, 나는 내가 이 시점에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깊이 생각해 보았다. 약관 20세인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공부를 최대한 열심히 하는 것이었다. 그 다음은 하늘에 맡기기로 했다. 모태신앙인 나는 모든 것을 하나님과 공부에 걸었다. 교회에서 하는 모든 일정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참여하였다.  잠은 8시간을 충분히 잤다. 그리고 그외 모든 시간은 공부에 쏟았다.  공부하기 위해서 밥을 먹었고, 공부하기 위해서 운동을 했으며, 공부하기 위해서 잤다. 마치  Energizer 건전지 선전에 나오는 드럼치는 토끼같이 나는 똑 같은 페이스로 계속 북을 치는 모습으로 공부를 하였다. 사실 학생은 풀타임으로 공부라는 직업을 갖고있는 프로와 마찬가지인데 우리 학생들에게는 그러한 개념이 없다. 나는 바둑에서 1초를 아끼는 대국자세로, 시험을 볼 때  마지막 1초도 허비하지 않았다, 시험보기 전에는 두뇌의 혈액순환을 돕기위해 물구나무 서기를 했다.  나는 프로와 같이 시간과 몸관리를 했다. 그러니까 별볼일 없던 나도 와튼에 들어갈 수 있었고, 그곳에서도 Top 30%안에 들 수 있었다.

 

내가 첫번째 책인 "대학학자금 가이드"를 내던때를 더듬어 보면서 지금도 나의 무모했던 행동에 놀라곤 한다. 나는 딸이 대학을 가면서 내가 알고 있는 대학학비보조를 한 번 책으로 내보자는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모든 자료들을 정리하고, "How to publish your own book"이란 책을 샀다. 그리고는 일을 시작한지 3개월만에 책을 뚝딱 만들었다. 처음 책이 뉴욕시 어느 동포인쇄소에서 나왔을때, 마치 한인회 정기간행물같이 디자인이 엉성하였다. 그래서 책 3천권을 모두 폐기하고는 출판사에서 일하셨던 분의 도움을 받아 그곳에서 책을 다시 뽑았다. 내 사무실 선반위에 쌓여있던 3천여권의 책을 보고 나는 판촉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책은 불티나게 나갔다. 그렇지만 북치고 장구치던 나에게는 일불도 남는 것이 없었다. 나는 광고를 실어주는 신문사에 도움주는 일만 한셈이었다. 그러나 선반이 모두 텅텅 비었을때, 3천여 동포가정 어딘가에 놓여있을 책을 생각해 보면서 내가 어떠한 일을 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을 한 사람은 출판사에서 섭외와서 책을 내는 꿈을 꾸게 된다. 나는 아들 현열이가 필립스 엑시터에 입학하면서 그가 공부하는 과정을 아버지와 아들이 보는 각도에서 기록해 보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 전에 발행한 책에 관심을 가졌던 로스앤젤레스 중앙일보 교육부 기자가 그글들을 연재해 보겠다는 제의를 해왔다. 그래서 2004년 경 나는 18회에 걸쳐 보딩스쿨에 대해서 그 신문에 연재를 하였다. 후에 그 글은 인터넷을 통해서 한국의 모든 유학기관에 퍼져 나갔고 나는 일약 보딩스쿨의 전문가가 되었다. 당시 신동아가 보딩스쿨 졸업생에 대해서 특집취재를 하면서 나와 연결이 되었고 내가 그동안 써왔던 글을 본 출판팀은 출판의사를 밝혀왔다. 그래서 나는 유명출판사가 섭외와서 책을 내는 사람이 되었다.  책의 제목은 "세계 1%를 꿈꾸면 두려움 없이 떠나라."인데 이 책도 모두 매진되었다. 곧 발행되는 개정판은 거의 화보수준으로 깔끔하고 고급스럽게 나오게끔 출판계획이 확정되었다.

 

나는 학문으로 상을 받아본적도 없고, 에베레스트와 같은 높은 산을 오른 적도 없다. 그저 삶에서 작은 목표를 세워놓고 정진하면서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내가 하는 일을 통해서 이웃에게 사랑을 전하고 사회를 "조금"이나마 긍정적으로 바꾸는데 일조하고 싶다. 내가 가끔 농담삼아서 친구들에게 나에게 한가지 하고싶은 야무진 꿈(?)이 있다고 말한다. 약 10년간 역기를 들었는데 몸을 좀더 가꿔서 Times Square Bill Board에 Calvin Klein 속옷 광고 모델로 나오는 것이다.  정 안되면 50대를 위한 기능성 속옷광고라도.....  그러면서 의기소침해 있는 나의 50대 친구들에게도 "너희들도 하면 된다"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