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난 20년간 크리스마스 카드에 집안식구 사진을 넣으면서 한 번도 집 사진을 포함시킨 적이 없다. 친지들이나 손님들 중에 그 것이 큰 부러움으로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집은 35만달러짜리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곳에 위치한 동네에 있으며 시가는 약 45만달러 정도 (4 Bed Rooms/3 Full Bathrooms) 된다. 지난 번 우연한 기회에 맨해튼 콘도의 가격(1베드룸 120만불)과 한인들이 모여사는 베이사이드나 팔리세이즈 파크의 평균 집값(2 베드룸 60만불)을 확인하고는 내 생각이 기우인 것을 알게 되었다. 지리적으로는 뉴욕에서 35마일 떨어진 뉴저지 주 버겐카운티 북부 오클랜드라는 곳에 있는데. 예전에는 호수가 많아서 포코노같이 뉴욕에 사는 사람들이 여름 집을 하나씩 갖고 있었던 곳이다. 우리가 집을 구입했을 때인 1988년에는 주로 백인 노동자들이 살았다. 재미난 일화로 현열이가 리틑야구 원정게임을 하러가면 선수 아빠들의 직업을 알려주는 Plumbing이나 전기공 소형트럭들이 뒤를 따랐던 것이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있다. 바로 옆에 있는 부자촌에서는 벤즈나 재규어 승용차들이 뒤따맀던 것과는 상반된 광경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지역도 많이 개발되어 젊은 Yuppy 가족들이 유입되면서 동네가 활기를 찾았다.
나는 이집에서 큰딸 지연이와 현열이를 길렀고, 막내딸 승연이도 여기서 자신의 추억을 쌓으며 자라고 있다. 집 뒤뜰은 숲으로 연결되어서 수시로 사슴들이 들어오고, 뒤뜰을 향하는 덱(Deck) 아래는 두더지, 그라운드 혹, 스컹크, 너구리가 자리다툼을 하면서 살고 있다. 한 때는 도둑 고양이가 그 밑에 둥지를 틀었는데, 햇볕이 쨍하게 비추던날 어미 고양이가 생후 1개월도 안된 가지각색의 아기 고양이 열마리 정도를 데리고 나와서 덱에서 뒹굴던 모습이 매우 평화로와 보였다. 분명히 어디서 걸어왔을 야생 칠면조도 찾아들었다. 산토끼들이 뒤뜰을 깡총깡총 뛰어다니는 모습도 종종 보이고, 다람쥐는 항상 목격되는 우리 가족의 일원이다. 밤에는 서로가 힘의 우열을 가르는 동물의 왕국이 되는데, 도둑 고양이와 동물들의 싸우는 소리에 여러번 잠에서 깨기도 했다. 한 번은 독수리가 전날 밤에 싸우다 죽은 동물시체를 먹으러 날아들기도 했었다. 전에 곰이 왔다가 간 자국을 목격한 적이 있었는데, 그날 저녁 우리집 소리샘에 옆집에서 "곰이 왔으니까 조심하라"는 메세지가 남아있었다. 우리 집은 아이들에게 살아있는 자연교육을 시킬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갖고있다.
우리동네는 자연을 만끽할 수 있고 미국의 평범한 가정들의 소박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나,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는 백인 노동자들이 주를 이루고 소수민족이 적어서 마이너리티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 그래서 큰딸 지연이와 아들 현열이는 이곳에서 힘든 중학교 시절을 보냈다. 결국 동네의 이러한 분위기는 나와 이웃간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우리집 뜰 면적은 약 1천평정도(0.7에이커)되는데 미국의 어느 집들과 마찬가지로 옆집과 경계를 가르는 벽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집의 반 밖에 안되는 뜰을 갖고 있는 위와 아래집과는 우리나라의 독도와 같은 영토문제가 늘 야기되었다. 아래집은 길이 꺽어지는 코너에 있기때문에 집뜰의 형태가 뒤쪽 경계가 앞보다 작은 5각형 형태 이다. 땅이 좁아서 그런지 아래쪽 집 사람이 나무 수십그루를 우리집 안으로 1 feet 들어와서 심어 놓았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그 나무들을 자신의 뜰로 옮겨심지 않으면 앞으로 내가 그나무들을 관리하겠다는 제의를 했다. 그러자 그들은 어느날 집 경계선을 따라 내 키만한 펜스를 세웠다.
아랫집에서 친 휀스
현열이가 대학에서 돌아온 날이었다. 나는 아랫집과의 문제를 알고 있는 그에게 펜스를 보여주었다. 그는 그쪽으로 다가 가서 오른손을 가슴에 대고 왼손으로 턱을 받지며 한참 생각에 잠기었다. 그러더니 그는 "아빠 저 옆집이 우리에게 상당히 안좋은 감정을 갖고 있었군요." 그러며 그는 "펜스의 높이를 보세요"라고 하면서 그 높이에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나에게는 우리의 문제를 종결해주는 평범한 펜스이었는데, 그의 눈에는 상대를 미워하는 상징적 물체이었고, 그 높이는 미워하는 정도를 가늠케하는 척도로 느껴졌다. 나는 그의 눈에 비춰진 사회의 모습이 단순한 나의 생각과 다르게 해석되었다는 것에 교육의 힘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