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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딸 박지연의 시집가는 날

박중련 2009. 2. 6. 12:57

 

                          2008년 5월 24일 토요일 뉴욕시 리버사이드 교회에서 페백드리는 지연(Irene)

 

결혼식날 온 사람들은 대학을 갓 졸업한 딸을 시집보내는 나를 보고 통곡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나는 이날을 4년이라는 그들의 긴 연애기간을 두고 준비하며 맞이했기 때문에 전혀 격한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딸의 손을 사위에게 전해주는 것은  우리가족 품에서 딸을 떠나 보내는 상징적인 마춤표에 불과했다. 지연이는 고등학교를 마친 후 사위인 대학을 마치고 온 란(Ronald Paik)을 연세대학교 한국어학당에서 처음 만나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갖나온 4년 어린 지연이를 친구로, 후에는 연인으로 대한 란의 판단력이나, 4년간 버지니아와 미시간을 오가며 이어진 그들의 만남은 한 폭의 그림으로 내가 존중해 주기에 충분했다. 지연이는 조그마한 도토리가 땅에 떨어져 큰 참나무가 되듯이 나의 별 도움없이 모든 것을 자기가 알아서 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결혼식 피로연에서 신랑 신부가  입장할 때,  작은 몸매이었지만 당당하게 손을 위로 흔들며 들어오는 모습은 웅장한 리버사이드 교회의  피로연 분위기를 완전히 압도했다.  그날 나는 그가 카리스마를 가진 당당한 여성이 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연이를 보면 윷놀이가 생각나는데, 아내가 만삭의 몸으로 구정에 친척집에서 모여 윷놀이를 하고 후라싱 아파트로 오다가 진통을 느껴 곧바로 병원에 가서 분만했기때문이다. 그의 음악적 재질을 발전시키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는 절대음감을 갖고 태어났다. 쉽게 말해서 셀폰을 치는 소리를 듣고 번호를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음악공부를 심도있게 하지 않았고, 그저 웬만한 악보를 키보드로 조금 기교있게 칠 수 있을 정도만큼만 했다. 누구나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교회에서는 자기보다 일찍 성장한 소위 쿨한 동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기도 했었고, 중학교때는 거의 백인인 동료학생들로 부터 왕따를 피하기위해 기죽이면서 보냈다. 그러나  동양인이 반 이상인 뉴저지 버겐카운티에 있는 버겐 아카데미안의 사이언스 아카데미(Academy for the Advancement of Science and Technology)에 진학하면서는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변했다.  

 

그곳은 대학에도 없는 나노 테크놀로지 연구실과 스템셀 연구실을 갖추고 있는 미국최고의 과학고로, 한 학년에 70-80명의 소수정예에게 영재교육을 시키는 곳 이다. 이 학교 수학팀은 필립스 엑시터, 토마스 제퍼슨의 수학팀들과 함께 미국 3대 고등학교 수학팀에 속한다. 매년 졸업생의 1/3이 하버드 MIT를 포함한 아이비리그로 진학하는데 지연이도 겨우 턱걸이나마 그안에 들었지만 그곳 공부는 쉬운게 아니었다.  그는 고등학교시절이  생애에서 가장 생산적이었고 즐거웠으며 많은 똑똑한 동료들과 생활하면서 자신이 겸허해 질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지연이는 그곳에서 학생회 부회장, 크리스찬 휄로우쉽인 하베스터클럽 회장과 고등학교 축구대표팀의 주장을 맡는 등 왕성한 특별활동을 했었다. 그리고 그는 카자스탄, 볼리비아, 온듀라스 등에 단기선교를 다녀오는 등 모든 일에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리더로서 맡은바 일을 충실히 해냈다. 

 

그러나 대학진학에 있어서는 그에게 큰 암운이 도사리고 있었다.  버겐아카데미는 카운티 소속 공립학교로 대학진학상담 선생님들은 학생들 위에 존재하는 군주나 다름없었다. 이는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와 같은 사립학교가 학생들을 왕같은 고객으로 여기고 도와주는 것과 완전히 다르다. 사친회가  약했고,  카운슬러의 횡포를 고발하기에는 학생이 겪을 리스크가 너무 컷기 때문이다. 11학년때 우리가 카운슬러와 단독으로 만날때 였다. 우리는 카운슬러가 지연이에게 나쁜 감정을 갖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연로한 그 여자선생님은 지연이의 낮은 영어 SAT성적을 가르키면서 앞으로 워싱톤 디시에 있는 아메리칸 대학쯤 갈 수 있겠다고  얘기했다. 우리는 높은 수학 SAT성적에 안좋은 영어성적을 합해 종합적인 평가를 내리거나, 영어성적을 더 올리면 목표를 놓이 잡을 수  있다는 긍정적인 답변을 기대했었다. 지연이는 얼마 안있어 영어 SAT 성적을 아이비리그 입학평균 까지 끌어올렸다.  그러한 카운슬러 태도의 이면에는 이유가 있었다. 지연이가 어느 학기 초 코스를 Drop하고 Add 하는 시점에서 선생님이 어느 코스가 닫혀있다고 주장했을 때 본인이 열려있는 것을 확인해서 바꾼적이 있었다. 이에 자존심이 상한 선생님은 그를 늘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지연이는 대학입학원서을 내는 기간에 그의 오피스에서 들렀다가 카운슬러가 멀리서 그를 보고 한숨을 푹쉬는 모습을 보고 아무말도 못하고 나왔다고 한다.

 

지연이는 아빠의 모교 유펜에 수시로 지원했지만 보기좋게 낙방했다. 그의 원서는 정시로도 넘어가지 못한 완벽한 낙방이었다. 그것은 그의 성적과 특별활동 그리고  아빠와 레가시인 것에 비추어 볼 때 상당히 이례적이었다. 도대체 추천서가 얼마나 나빴으면 이렇게 되었을까? 수시발표가 있었던 날 지연이는 낙방소식을 전해주지 못하고 끙끙대다가 자정이 되어서야 엄마 귀에 눈물을 흘리면서 속삭였다고 한다.  후에 예일, 컬럼비아, 코넬, 다트머스, 조지타운, 죤스 홉킨스, 터프스 등 모든 대학으로부터 낙방편지를 받았다. 뉴욕주립 빙햄턴대학에서는 일푼의 장학금도 주지 않는 낙방이나 다름없는 합격통지를 보내왔다. 그를 유일하게 반겨준 대학은 4년간 6만달러의 장학금을 제시한 미시간대학 뿐이었다.  그는 대학에서도 고등학교때와 같이 왕성하게 활동을 했다. 미시간대학 TV 방송국에서 리포터와 앵커워먼을 지냈으며, 1학년 여름방학때는 워싱톤 디시에 있는 Amnesty International에서 인턴을 보냈고, 2학년 여름방학때는 뉴욕주 대법원 판사 밑에서 인턴을 지냈다. 이러한 것은  미시간 대학의 방대한 동창조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쳤고, 법학대학원 수능시험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거의 모든 대학으로부터 떨어졌던 지연이는 2009년 9월학기에 맞추어 지원한 모든 법학대학원으로 부터 입학허가서를 받았다.  듀크를 신호탄으로, 그리고 버클리, 조지타운, 시카고, NYU등으로 이어졌는데 이것은 마치 반전드라마와 같았다. 그는 시카고에 있는 일리노이대학병원 정형외과 레지던트인 남편과 함께 살며 공부할수 있는 시카고 대학으로 정했고 지금은 시카고의 한 로펌에서 Associate으로 일하고 있다. 시카고대학은 수시이었기 때문에 입학통지를 받고는 다른 법학대학원에 지원을 철회한다는 편지를 보내야 했다.

 

그가 어느 대학을 졸업했는가 또는 어느 대학원에 갈 수 있는가는 남에게 객관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기준이 될 지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어진 환경에서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와 자신이 속한 조직과 사회에 얼마나 긍정적으로 기여했는가 이다. 그는 하나님이 박지연에게 주어진 삶을 최대한 노력해서 발전시키면서 살았다.  나도 모르게 멋지게 변한 지연이가 법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나면 또 모습으로 성장해 있을지 설레여진다.